▲어린 시절 잘 보관해놓았던 <아이큐 점프> 별책부록
김종수
정보는 적었지만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WWF1960~1970년대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던 격투 스포츠하면 복싱과 함께 프로 레슬링을 꼽을 수 있다. 특히 프로 레슬링은 다소 만화적인 연출도 풍부했던지라 애국주의가 팽배하고 볼거리가 적었던 당시 시대 속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단순히 남성에게만 인기있던 게 아닌 남녀노소, 나이 불문 최고의 관심을 받았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나는 그 시절 프로레슬링은 잘 알지 못한다. 그 시절을 지켜본 어른들 말씀과 남아 있는 자료 그리고 회자되고 있는 미디어 등을 통해 장영철, 천규덕, 안명길, 이석윤, 김일 등이 굉장한 선수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들어 알고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제대로 기억하는 것은 김일로 대표됐던 국내 프로레슬링이 아닌 멀리 미국 땅의 WWF 프로레슬러들이다. 지금은 WWE(World Wresting Entertainment)지만, 당시는 분명히 WWF였다.
사실 당시는 케이블이나 위성방송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지금의 종합 격투기처럼 자주 보기는 어려웠다. 돈 많은 집이나 안테나를 달아 외국 방송을 시청했지, 평범한 서민층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책이나 신문 혹은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 녹화 영상을 보든지, 오락실 게임기를 통해 간접 체험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아참! 만화 잡지 <아이큐 점프>를 통해 별책 부록으로 지식을 쌓아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이큐 점프>를 통해 '슈퍼스타 게임', '레슬매니아', '핫티스트 게임', '메가매치', '썸머슬램', '올스타전', '슈퍼스타 퍼레이드', '월드투어', '로얄럼블' 등 명 경기 비디오 테이프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기억도 난다. 물론 당시 난 어린 아이였던지라 탐나기만 했지 실제로 사보지는 못했다.
동심을 지배했던 'WWF의 스타들'WWF 최고의 슈퍼스타는 단연 헐크 호건(303파운드)이었다. 빨간색 두건과 황금빛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던 그는 지금 보면 상당한 노안이었다. 당시 나이는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을 텐데 이목구비와 노란색 콧수염 때문에 마치 할아버지같은 느낌까지 줬다.
하지만 온몸이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고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이미지가 강했던지라 중요한 승부의 주인공 이미지가 강했다. 강한 상대들에게 얻어맞다가도 "지상 최고의 내 팔뚝과 팬들의 성원을 당해낼 것 같나?"라는 말을 내뱉은 후 로프 반동을 이용한 렉드롭을 시전하면 승리는 그의 것이었다.
핵소 짐 더간(280파운드)은 마치 우락부락한 도사견을 연상케 하는 포악한 성격의 선수였다. 무식할 정도로 저돌적이고 트레이드 마크처럼 각목을 들고 링에 올랐다. 외모나 포스만 보면 딱 악역인데 더간은 정의로운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외모와는 달리 항상 약한 선수를 도와주는 다혈질의 터프가이 역할을 주로 맡았다. 단거리 선수가 뜀박질하듯 도사견 자세에서 튀어나오는 그의 장기 빨랫줄 기술은 걸렸다하면 어떤 상대라도 넉아웃 될 정도로 강한 위력을 자랑했다.
멕시코 토큐라 출신의 티토 산타나(244파운드)는 성실함의 대명사였다. 튼튼하고 성실하며 조금은 우직한 스타일인 그의 공중 날라차기 기술은 매우 위력적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큰 거구들도 산타나의 공중 날라차기에 걸리면 견디지 못하고 나가 떨어지기 일쑤였다.
피지섬 출신으로 알려진 지미 스누커(245파운드)는 '수퍼 플라이'라는 멋들어진 닉네임이 따라붙었다. 닉네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다양한 공중 공격의 대가였다. 스누커는 숨 쉴 틈없는 공중 공격으로 상대의 얼을 빼놓는 데 능했다. 폴리네시아 원주민인 피지족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WWF에서 몇 안되는 공수를 겸비한 기술을 갖췄다.
보편적으로 반칙은 잘 하지 않고 거의 로프 반동이나 코너의 도약을 이용해 상대 선수의 체력을 약화시켰다. 쇼울더 블록과 크로스라인이 일품이었다. 그로기 상태에 있는 상대를 향해 톱 로프 위로 올라가 몸을 날렸다 하면 상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실신했다.
한 손에 가죽 장갑을 낀 스킨헤드 스타일의 덩치 큰 흑인 배드 뉴즈 브라운(271파운드)은 뉴욕의 할렘 출신이다. 그는 인종차별에서 느낀 멸시를 링에서 실컷 풀기 위해 프로레슬러가 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펀치는 '유대인 펀치(?)'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레슬링에 의존한 기술보다는 상대에게 강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잔인한 반칙으로 게임을 풀어나갔는데, 레슬링이 좋아서가 아니라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수시로 내뱉었다. 전형적인 악당형 캐릭터였다.
선원 모자에 줄무늬 런닝셔츠 그리고 하얀색 바지를 입은 터그 보트(340파운드)는 전형적인 선원 콘셉트였다. 한때 NWA의 무명 선수로 활동했던 그는 WWF로 옮겨오면서 삽시간에 인기 몰이를 했다.
어렸을 적부터 헐크 호건을 좋아해서 그를 위해 바치는 존경심은 어지간한 여성의 사랑에 못지않을 정도다. 호건의 적을 자신의 적으로 간주해 대신해서 방패막이 역할까지 해주었다. 승리에 들떴을 때 출항하는 배를 연상시키듯 '뚜~'하는 뱃고동 소리를 내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보트는 경기의 항해를 끝내고 돛을 내리고자 하면 턴버클로 올라간다. 여기서 그가 상대 선수를 향해 떨어졌다 하면 엄청난 해일이 동반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샤롯데 출신의 러기드 로니 가빈(242파운드)은 네모난 얼굴에 머리까지 스포츠형으로 밀어붙인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사나이로 '철의 주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파이팅 스타일은 자로 잰듯한 계산 하에 완벽한 기술로 상대를 압도해가는 식이었다. 뚜렷한 무기는 없었지만, 구태여 필살기를 논하자면 화가 났을 때 상대를 마구잡이로 밟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당시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 안에서 학대받던 리투아니아 공화국 출신의 니콜라이 볼코프(310파운드)는 큰 덩치만큼이나 순박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고르바초프와 부시 대통령의 냉정 탈피정책에 전적으로 박수를 보내면서 미국에 호의적인 감정 이상의 충성심을 보여줬다. 어찌 보면 미국 단체에서 일부러 잘 만들어놓은 캐릭터였던 것 같다. "신이시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라며 성조가를 불러대던 모습은 지금에서 보면 너무 '오글'거린다.
제이크 '더 스테이크' 로버츠(249파운드)를 기억하는 팬들은 지금도 많다. 호건이나 워리어처럼 극강의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닉네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뱀을 트레이드 마크처럼 썼기 때문이다. 자신의 팔뚝만한 뱀 '데미안'을 목에 감고 다니며 악역 레슬러들을 혼내주던 그는 WWF의 신사로 유명했다. 약간은 독불장군 스타일이었는데 항상 특이하고 색다른 방법으로 싸워나갔다. 그의 싸늘한 두 눈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머리털이 곤두서지 않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잘생긴 얼굴과 멋쟁이 옷차림을 하고 다니던 모델 릭 마텔(234파운드)은 기술은 뛰어났지만 평판은 좋지 않았다. 반칙과 잔인한 술수를 주특기로 했기 때문이다. 툭하면 자신이 WWF 최고의 멋쟁이라며 남성의 표본인 양 떠들고 다녔다. 항상 남성 향수와 모델비전이라는 안경을 끼고 다녔고 상대 선수의 눈에 공업용 향수를 뿌리는 악당 짓도 서슴치 않았다. 월등한 체격 조건과 힘 그리고 스피드까지 겸비한 그는 자신의 주특기 보스톤 크랩으로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즐겼다.
코코 비 웨어(228파운드)는 지미 스누커와 함께 WWF 공중공격을 대표하던 선수였다. 테네시주 유니언시티 출신인 그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WWF의 갈색 폭격기라고 불렸다. 기술과 체력 면에서는 남부럽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기량에서 살짝 떨어졌던지라 WWF 슈퍼스타들에게는 대부분 패배를 기록했다. 웨어는 기민성과 번개같은 신속함 등을 무기로 쉴 새없이 상대에게 공중 공격을 먹였다. 로버츠가 뱀을 콘셉트로 했다면 웨어는 앵무새 '후랭키'를 항시 들고 다녔다.
아프리카 원시림 출신으로 자신을 소개하던 아킴(450파운드)은 WWF를 대표하던 악역 거구중 하나였다. 링네임마저 '거대한 아프리카인', '손버릇 나쁜 손님'일 정도였다. 반칙과 야비한 술수의 전문가로, 매니저로는 자신의 성격과 잘맞는 슬릭을 두고 있었다. 매니저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상대 선수를 반죽음 상태까지 공격하는 것을 즐겼다. 거구의 몸을 날려 쓰러진 상대 몸 위로 날리던 엘보드롭은 그야말로 보는 이들을 아찔하게 했다.
캐나다 퀘백 몬트리얼 출신의 디노 브라보(260파운드)는 교활한 기습 공격의 명수로 악명을 떨쳤다. 항상 자신이 세계 최강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며 매니저로는 역시 딱따구리 떠벌이 지미 하트를 두고 있었다. 악당 캐릭터답게 호건, 보트 등과 대립각을 이루며 스토리를 써갔다.
출신지, 생일 등 모든 게 미상인 파이터 얼티밋 워리어(279 파운드) 눈에 가면 모양으로 물감을 칠하고 이두박근 쪽에 다양한 색깔의 끈을 묶어 근육을 더 돋보이게 했는데 유일하게 호건과 '최고 슈퍼스타' 자리를 겨룰 수 있는 캐릭터였다. 미국 현지까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국내에서는 호건 못지 않은 존재감과 인기를 누렸던 레슬러로 기억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용맹성과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시합에 뛰어드는 저돌적 근성, '최후의 전사'라는 링네임이 딱 어울리는 선수였다. 그의 전투력은 그야말로 엄청났는데 고릴라 프레스와 콤비네이션 양훅을 통해 수없이 많은 강적들을 쓰러트렸다.
플로리다 주 사라소타 출신 마초 킹 랜디 새비지(245파운드)는 호건과 워리어의 '양대구도'에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스타였다. 악녀 퀸 셰리를 매니저로 두고 있는 그는 "자신만이 레슬링계의 제왕이다"라고 큰소리로 떠들고 다녔다. 턴버클 꼭대기에서 떨어지며 가하는 무릎공격 등 예술과도 같은 고난도 공중 공격과 각종 다양하고 세련된 기술을 구사하던 기량과 캐릭터 성을 두루 갖춘 최고의 악역이었다. 단순한 악당이 아닌 악당 대장 같은 이미지를 풍겼다.
프로 레슬링의 악당 총집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