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구시가에서 시간여행 인력거를 끄는 박경훈씨
매거진군산 진정석
"나, 아기 아빠 된다!"
경훈씨는 총각, 스물아홉 살. 자랑하고 싶었다. 참을 수 없어서 친구들한테 문자를 보냈다. 그 날은 2010년 4월 1일. 모두들 만우절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 한 명만 "경훈아, 축하한다"고 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여자 친구 부모님은 "이 결혼 반댈세" 하지 않았다. 경훈씨는 감격했다. 그는 한 쪽 눈이 안 보인다. 2009년 8월에 산재를 당했다.
군산 동고등학교를 졸업한 경훈씨는 익산대학교 전자공학과에 1년간 다녔다. 경기도 구리에서 포병으로 군 복무를 했다. 제대하고는 군산으로 왔다. 자동차 유리와 오토바이 헬멧의 섬유재질을 만드는 회사에 다녔다. 6개월만 알바로 하려고 했는데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다. 계속 다녔다. 1년 6개월쯤 일하니까 학교 공부에 대한 의미가 없어졌다. 자퇴서를 냈다.
"4조 3교대를 했어요. 비정규직이었죠. 엄청 열심히 했거든요. 형님들도 '경훈이 혼자서 두 사람 몫 한다'고 칭찬했어요. '너는 정규직 해야 된다'면서 티오(자리를 뜻하는 군대 용어)나오면 무조건 추천해 준다고 했죠. 잔업 해서 월급도 200만 원쯤 됐어요. 젊으니까, 안주하면 안 되는데 재밌더라고요. 햇수로 6년 다녔어요. 근데 2008년 7월에 회사가 부도났어요." 경훈씨는 곧바로 통영에 본사가 있다는 어느 조선소의 교육생이 됐다. 군산에 조선소를 세우면 들어가서 일할 수 있도록 6개월간 교육 받았다. 하지만 그 회사는 군산 부지 매입에 실패했다. 교육생들은 "조선소 본사로 가면 기술도 많이 배울 수 있고, 정규직도 될 수 있어"라면서 통영으로 갔다. 경훈씨는 '정규직'이라는 말에 회의적이었다. 기대를 안 했다.
2008년 12월, 경훈씨는 목포로 갔다. 그 곳에도 조선소의 하청 업체가 있었다. 배는 철판에 미리 스케치(마킹, 밑 작업)를 하고서 용접을 한다. 경훈씨는 마킹 작업을 했다. 그는 철판끼리 고정하는 용접 작업 현장에 있었다. 펑! 커다란 핀이 튀었다. 순식간에 경훈씨 눈동자로 날아들었다. 경훈씨는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됐다. 2009년 8월이었다.
"보호자 동의가 있어야 수술을 할 수 있대요. 부모님이 알면 마음 아파하실 것 같았어요. 그래서 형만 오라고 했어요. 광주까지 온 형이 제 상태를 보고는 바로 아버지한테 연락을 했어요. 그때까지도 저는 '수술하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했죠. 아버지가 와서는 무조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자고 했어요. 서울에서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는데 잘 안 됐죠." 경훈씨는 병원에서 3개월을 지냈다. 스물여덟 살,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살아야 한다. 그걸 받아들여야 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부인하지 않았다. 경훈씨는 퇴원해서도 3개월 동안은 집에서 요양했다. 2주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갈 때만 외출했다. 막상 사람들과 눈 마주치는 게 두려웠다. 꿋꿋하게 나서려고 해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