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담과 골목길, 정겨움과 여유가 담겨 있다

[옛 것의 아름다움] 경북 청도의 흙담길

등록 2015.05.31 15:14수정 2015.05.31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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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치와 격조가 있는 흙담길
운치와 격조가 있는 흙담길이승숙

돌담이 아름다운 마을


작년에 충남 보령과 부여 쪽으로 여행을 갔다 온 적이 있다. 성인인 아이들과 어렵게 시간을 맞춰 떠나는 여행인지라 이왕이면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충청도의 명소들을 소개한 글을 미리 찾아보다가 돌담이 아름다운 마을을 알게 되었다.

충남 부여군 반교리는 돌담으로 유명한 동네다. 그 동네의 돌담은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특별히 관리되고 있다. 등록문화재란 국보나 보물 등의 문화재는 아니지만 특별히 보존할 필요성이 있는 건축물 등을 나라에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돌담 중에서도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된 곳이 꽤 되었다. 전국에서 18곳이나 된다는데, 대부분 경상도와 전라도 쪽에 있다고 한다. 

돌담이라면 나도 한 마디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동네는 집이고 밭이고 모두 돌담 일색이었다. 그런 동네에서 자랐으니 돌담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우리 고장에서는 돌담을 '돌다무락'이라고 불렀다. '다무락'은 '담'을 뜻하는 경상도 방언이니 '돌다무락'은 돌로 만든 담이란 말이 되겠다.

그때는 돌다무락이 너무나 흔해서 별스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타향을 떠돌다 보니 돌다무락과 꼬불꼬불했던 동네 골목길이 귀하게 여겨졌고 어깨를 맞대고 오순도순 정겹게 살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담 너머를 기웃대는 개나리
담 너머를 기웃대는 개나리이승숙

시골 집은 대개 평수가 넓다.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헛간채와 마당 등이 있으니 못 잡아도 일이백 평은 다 넘는다. 그렇게 넓은 집에 담을 두르자면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돌로 담을 쌓았으니 들어간 돌이 오죽 많았을까. 그러니 돌이 흔한 곳이 아니라면 돌담을 쌓을 수가 없다.
돌담은 평야지대보다는 강 근처나 산밑 마을에 많다. 모래가 많은 강의 하류 보다는 자갈이나 굵은 돌맹이들이 깔려있는 중상류 쪽 마을에서 돌담을 볼 수 있다. 그런 동네의 개울에는 수박덩이만한 돌들이 흔하게 굴러다닌다. 산 밑의 밭에도 돌이 많았다. 호미 끝에 부딪히는 돌을 캐내어서 한 곳에 모아두었다가 밭가를 따라가며 담을 쌓았다. 개울 돌로는 집 담을 쌓고  땅 속에서 캐낸 돌로는 밭담을 쌓았다.
부여의 돌담마을 역시 개울을 끼고 있는 산 밑 동네였다. 골목을 따라 걷노라니 나지막한 돌담들이 정겹게 다가왔다. 투박한 돌과 반들반들한 강돌들이 섞여 있었다. 땅에서 캐낸 돌과 개울에서 가져온 돌들이다. 별다를 것 없던 그 마을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골목에서 길을 잃다
부여 반교리의 돌담마을을 둘러보노라니 내 고향 동네가 떠올랐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내 고향의 돌담도 꽤 아름답다. 전량 돌로만 쌓은 반교리 돌담과 달리 우리 동네는 흙과 돌을 반반씩 섞어서 담을 쌓았다. 흙담은 화려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누추하지도 않다. 흙담에는 반가의 여인 같은 기품이 어려 있다. 돌담이 꾸미지 않은 시골 아낙 같은 건강함을 보여준다면 흙담은 살림이 택택한 집안의 안주인 같은 윤택함이 있다.


 명대 동네의 담은 모두 이런 흙담이었다.
명대 동네의 담은 모두 이런 흙담이었다.이승숙

지금은 인구수가 많이 줄었지만 한창 때는 약 사백 가구 정도가 모여 살았다고 하는 우리 동네는 농촌치고는 규모가 꽤 큰 동네였다. 같은 성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보니 모두가 일가요 친척 간이었다. 길을 가다가 어른을 만나면 "아제요, 밥 잡사십니꺼?"하면서 인사를 했고 "오야, 니도 밥 먹었나." 하시면서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받아주었다. 담을 사이에 두고 형제가 나란히 살았으며, 온 동네 전체가 한 집안이나 매한가지였다.

우리 동네는 명대, 온막, 원앞, 당걸, 이렇게 네 개의 마을이 모여서 이루어진 동네였다. 학교가 있고 오일장이 서는 명대 동네가 맏이 격이라면 원앞이나 온막 그리고 당걸은 큰 동네에 딸린 작은 마을이었다.


우리 집은 윗동네인 온막에 있었다. 집에서 학교에 가자면 큰 동네인 명대를 거쳐 가야 했다. 당시 명대는 정말 큰 동네였다. 그만 그만한 집들이 올막졸막 모여 있는 우리 동네와 달리 명대에는 오래된 기와집도 많았고 골목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도대체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소라 고동의 창자처럼 길은 꼬불꼬불하게 끝없이 이어져 있어서 타동네 사람들은 헤매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 우리들에게 학교까지 오가는 그 길은 색다른 탐험이었다. 큰 동네 속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꼬불꼬불 걸어가자면 기왓장에 이끼가 낀 고택도 있었고 큰 홰나무가 서있는 동네 우물도 지났다. 서른 집 남짓밖에 되지 않아 누구네 집인지 다 아는 우리 동네와 달리 명대 동네는 하도 커서 누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 싶었다.
 흙담에서는 격조가 느껴진다.
흙담에서는 격조가 느껴진다.이승숙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달이 지나자 늘 다니는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이 궁금해졌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낯선 길로 들어가 봤다. 얼마 안 가 우리는 방향을 잃고 말았다. 이 쪽이다 싶어 가면 또 다른 골목이 나타났고 저 쪽이 맞지 싶어 가보면 막다른 길이었다. 동네 안은 마치 미로 같았다. 그때 얼마나 막막하고 겁이 나든지, 어린 우리들은 집으로 돌아갈 길을 영영 찾지 못할까 봐 더럭 겁이 났다.

음력으로 섣달에 태어나서 또래들보다 어렸던 애가 있었다. 그 애의 할머니는 우리를 보면 늘 "우리 명희 잘 데리고 다녀 도고." 하면서 신신당부했다. 생일이 빠른 아이들도 길을 잃고 헤맬 정도인데 섣달생 아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명대 동네 속의 골목길은 꼬리를 감춘 채 요리조리 잘도 나아갔다. 

인정이 넘나들던 흙담

동네 안 골목에는 흙담이 양 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우리들에게 그것은 궁궐의 담장만큼이나 대단해 보였다. 돌담이 빙 둘러있는 우리 동네 집들이 민가라면 끝없이 흙담이 이어져있는 명대 동네는 반가(班家)처럼 느껴졌다. 시골 아이들이 도시에 가면 기가 죽어 입이 굳는 것처럼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우리에게 명대는 대처(大處)였다.

담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어른들 어깨높이 정도였으니 발돋움을 조금만 하면 집의 마당이 다 들여다보였다. 마당을 돌아다니는 닭도 보였고 마구간에 있는 소도 보였다. 담은 있었지만 밖과 안을 완벽하게 차단하지는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담 안을 건너다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담을 사이에 두고 음식 그릇이 오가기도 했다. 그것은 일종의 경계선이었지 이웃을 밀어내는 차단벽은 아니었다. 

 흙반죽과 돌을 층층이 쌓아서 흙담을 만들었다.
흙반죽과 돌을 층층이 쌓아서 흙담을 만들었다.이승숙

그때는 길이 좁고 구불구불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게가 주요 운송수단이었던 시절이었으니, 지게를 진 두 사람이 서로 비껴갈 수 있을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나 경운기가 나오자 사정이 달라졌다. 경운기는 짐을 싣고 다니는 짐칸이 있어서 넓은 길이 필요했다. 경운기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히는 공사를 하면서 명대 동네의 흙담 중 일부는 시멘트 블록담으로 교체가 되었다.

돌담은 비를 맞아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흙담은 비를 맞으면 허물어진다. 그래서 흙 담 맨 위에는 마치 처마를 단 것처럼 기와를 올린다. 빗물이 바로 담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방비를 해도 어느 결에 물이 스며들어가서 무너지는 곳이 생긴다.
흙담은 유지하고 보수하는데 공이 좀 들어간다. 비가 스며들어 무너져 내리면 다시 흙을 개어서 돌 한 층 흙반죽 한 층 씩으로 쌓아올려야 했다. 일손이 많을 때는 보수를 하는 것도 큰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고 일손이 부족해지자 흙담을 간수하는 것도 큰일이 되어 버렸다. 무너진 담벼락을 보수하지 않으면 연달아 있는 담벼락들이 또 무너져 내린다. 임시로 비료포대로 덮어두기도 하고 비닐 갑바(커버)를 씌우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변통일 뿐이다.  
 이 흙담의 나이는 몇 살이나 됐을까?
이 흙담의 나이는 몇 살이나 됐을까? 이승숙

  사람들은 관리하기에 쉬운 시멘트 블록으로 담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흙담들이 사라져 갔다. 편리함을 쫓아가는 세태 앞에 흙담은 과거의 유습인 양 취급되었다. 똑같은 듯하면서도 서로 달랐던 집집의 흙담들이 한 공장에서 나온 똑같은 블록담으로 획일화 되었다.
집안 행사가 있어 친정에 갈 일이 생겼다. 이번 참에는 흙담을 꼭 보고와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부터 동네 속으로 들어갈 일이 없어졌다. 우리 동네로 올라가는 길이 새로 났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짬을 내어 옛날 우리가 다녔던 그 길을 찾아가 보았다. 흙담을 보기 위해 차에서 내려 동네 안으로 들어갔다.

개발과 보존, 무엇이 정답일까

그렇게 크고 대단했던 동네였는데 이제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듯이 보였다. 우람하던 기와집들은 간 곳이 없고 군데군데 빈 터만 횅하니 남아 있다. 흙담이 아름다웠던 골목길은 회색빛 일색이었다. 내가 그렸던 흙담과 골목길은 이제 그곳에 없다. 다정하고 포근하던 옛날의 그 정취는 간 곳이 없다. 다른 동네와 달리 특별했던 동네였는데, 이제는 다른 동네와 다를 바가 없이 변해 있었다. 

더러 흙담이 남아있는 집들도 있었다. 세월의 연륜이 묻어있는 옛 집들과 흙담은 아련한 향수를 전해 주었다. 그런 집들은 사람 사는 도리를 다하며 살았던 옛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경박하지 않은 처신도 보여 준다. 생활의 편리와 경제성을 쫒아 옛 집을 허물고 들어선 정체모를 서양식 집들과 달리 옛 집과 흙담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격조가 느껴졌다.

 흙담에 빗물이 스며드는 걸 막기 위해 기왓장이나 솔가지를 맨 위에 얹었다. 쓰레트를 얹은 흙담.
흙담에 빗물이 스며드는 걸 막기 위해 기왓장이나 솔가지를 맨 위에 얹었다. 쓰레트를 얹은 흙담.이승숙

그렇게 운치와 격조가 있는 흙담이지만 언제 또 헐릴지 예측할 수 없다.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는 시대에 좁은 골목은 차가 다니기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집 마당까지 차가 들어가야 하는데, 우렁쉥이 창자 같은 꼬불꼬불한 골목길은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살기에는 좋지 않다. 그러니 마을길을 개선하는 노력을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동네 이장은 마을길 개선사업을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니 그것을 뭐라 할 자격이 우리에겐 없다. 우선 보기에 좋은 흙담보다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좋아야 한다. 그렇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나는 마치 어린 시절을 도둑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흙담은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것들을 보여준다. 경쟁보다는 배려를, 쫒기듯이 사는 바쁜 생활보다는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를  준다. 흙담이 늘어서있는 골목길에는 정겨운 이야기가 담겨있는 듯하다. 그 골목길은 동네의 역사이고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런 흙담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거라고 하니, 아쉽고 안타깝다.

개발과 보존은 여기서도 충돌을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라지는 옛 것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모란과 흙담.
모란과 흙담. 이승숙

#돌담 #흙담 #경북 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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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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