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 동네의 담은 모두 이런 흙담이었다.
이승숙
지금은 인구수가 많이 줄었지만 한창 때는 약 사백 가구 정도가 모여 살았다고 하는 우리 동네는 농촌치고는 규모가 꽤 큰 동네였다. 같은 성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보니 모두가 일가요 친척 간이었다. 길을 가다가 어른을 만나면 "아제요, 밥 잡사십니꺼?"하면서 인사를 했고 "오야, 니도 밥 먹었나." 하시면서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받아주었다. 담을 사이에 두고 형제가 나란히 살았으며, 온 동네 전체가 한 집안이나 매한가지였다.
우리 동네는 명대, 온막, 원앞, 당걸, 이렇게 네 개의 마을이 모여서 이루어진 동네였다. 학교가 있고 오일장이 서는 명대 동네가 맏이 격이라면 원앞이나 온막 그리고 당걸은 큰 동네에 딸린 작은 마을이었다.
우리 집은 윗동네인 온막에 있었다. 집에서 학교에 가자면 큰 동네인 명대를 거쳐 가야 했다. 당시 명대는 정말 큰 동네였다. 그만 그만한 집들이 올막졸막 모여 있는 우리 동네와 달리 명대에는 오래된 기와집도 많았고 골목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도대체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소라 고동의 창자처럼 길은 꼬불꼬불하게 끝없이 이어져 있어서 타동네 사람들은 헤매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 우리들에게 학교까지 오가는 그 길은 색다른 탐험이었다. 큰 동네 속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꼬불꼬불 걸어가자면 기왓장에 이끼가 낀 고택도 있었고 큰 홰나무가 서있는 동네 우물도 지났다. 서른 집 남짓밖에 되지 않아 누구네 집인지 다 아는 우리 동네와 달리 명대 동네는 하도 커서 누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