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 : 정명공주와 광해군의 정치 기술> 표지
리베르
정명공주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광해군이다. 저자는 "광해군이란 프리즘만으로 당대의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시각의 사각지대를 갖게 된다"(분몬 4쪽)라며 정명공주라는 새로운 프리즘을 통해 광해군 시대를 재조명하고자 했다. 광해군 하면 연관 검색어처럼 따라오는게 '대동법'과 '실리외교'다. 이 두 가지 때문에 '개혁군주'로 평가받지만 저자가 보기에 이는 상당히 과장된 평가다.
"광해군은 현군(賢君)인가, 혼군(昏君)인가? 광해군의 '화려한 정치' 여정에는 늘 정명공주가 광해군의 그림자인양 따라다니고 있었다. '화려한 정치'가 빛을 타고 있다면 '빛나는 다스림'은 그림자에 얹혀 있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는 눈이 필요하다."(본문 183쪽)흔히 광해군은 양반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동법을 시행한 '애민 군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대동법 시행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경기도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행해졌다. 1609년 곽재우를 비롯한 신하들이 대동법의 확대를 주장하자 광해군은 오히려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며 이를 반대했다. 결국 대동법은 흐지부지됐고 광해군은 오히려 토목공사를 위한 특별 공물 징수에 더 신경을 많이 썼다.
저자는 "정책의 주안점이 조세 개혁을 통한 민생 안정보다는 토목 공사를 통한 왕권 강화, 즉 화려한 정치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라면서 "광해군이 세자 시절부터 지녔던 '빛나는 다스림'에 대한 초심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본문 117쪽)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무리한 토목공사는 인조반정의 주요한 명분이 됐다.
쇠락하는 명과 부상하는 후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조선. 저자는 광해군의 실리외교가 탁월한 외교적 수완이라기보다는 힘 약한 나라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평가한다. 명-후금의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라는 명의 요구를 거절하지도 못하고, 후금과 전면적으로 싸울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명과 사대부의 요구를 못이겨 1만3000여 명을 파병했다. 이 중 무려 9000여 명이 전사하고 4000여 명 후금의 병력에 편입되거나 농사에 동원됐다.
저자는 "광해군에게는 주도적으로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숱한 옥사로 조정에는 제대로 된 인재가 사라졌고, 대동법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흐지부지해졌다. 국방에 신경을 쓰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궁궐 공사로 국력을 낭비해 집중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다"라며 "이것은 광해군의 한계, 조선의 한계였다"(본문 166쪽)라고 지적했다.
광해군이 현군(賢君)이었는지, 혼군(昏君)이었는지는 역사가 평가하겠지만, 그의 정치를 백성을 향한 '빛나는 다스림'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광해군의 집권으로부터 이어진 17세기 조선의 정치사는 민중에게는 '잔혹사'였다.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수많은 백성이 고통받고 죽임을 당했다.
조선의 권력층은 당파싸움에 열중하며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았다. 17세기 중반 '대기근'의 시기, 백성들은 죽은 자식을 삶아 먹을 정도로 굶주리며 나라가 파멸의 지경에 이르렀지만 위정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참혹한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늘에 가려져 있던 정명공주의 '화정'을 더 돋보이게 한다.
"세상에 선과 악의 싸움은 드물다. 선과 선의 싸움이 대부분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자신을 향한 '빛나는 다스림'이다. 붕당에 찌든 조선은 '선'이 '선'을 죽이는 사회였다. 화정이라는 화두가 우리 머릿속에 늘 머무른다면, 빛나는 다스림이 나로부터 시작해 주변으로 확산된다면, 남을 다스리기 전에 나부터 다스리나면, 나와 너는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머리말, 본문 9쪽)
화정 - 정명공주와 광해군의 정치 기술
박찬영 지음,
리베르,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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