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양철북
"자기들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으면 그저 사춘기라서 그렇다는 둥 반항기라서 그렇다는 둥 쉽게 말해 버리잖아. 그러면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하겠지."
"가스리도 그런 선생님을 만난 경험이 있나 보지?"
"있고말고요."
잘난 척하며 가스리가 대답하자, 미네코가 말했다.
"그런 말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애도 똑같이 둔해."
순간, 가스리는 발끈해서 곧바로 되받았다. "그런 말로 자기 자식을 탓하는 부모도 둔해."(<소녀의 마음> 10, 21쪽)
하이타니 겐지로님이 쓴 청소년문학 <소녀의 마음>(양철북, 2004)을 읽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소녀'는 열여섯 살입니다. 열여섯 살 나이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헤어집니다.
어머니는 새로운 사내를 맞아들여서 딸아이와 함께 삽니다. 아버지는 홀로 판화를 새기는 일을 하면서 삽니다. 어머니가 새로 맞아들인 사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집을 떠납니다. 열여섯 살 아이는 이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봅니다. 혼자 사는 아버지한테 생긴 새로운 짝을 한 번 만나는데, 아버지는 다시 혼인을 할 뜻이 없습니다. 아니, 다시 혼인을 하더라도 아이를 더 낳을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새롭게 생긴 짝을 떠나 보내고, 다시금 홀로 조용히 판화를 새기면서 삽니다. 이동안 '소녀'는 한 살을 더 먹고, 또 한 살을 더 먹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애쓰는 건 괜찮지만, 무조건 학교에 보내려고만 하니까 엣짱은 껍데기 속에 웅크린 달팽이가 되어 버렸어." "아이를 물질적으로나 금전적으로 고생시킨 적은 없고?""당연하지.""아주 상식적인 사람들이겠지?""물론이야.""이혼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들?""아마도." 가스리와 키쿠코는 얼굴을 마주보고 후후후 웃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걸 행복이라고 말하겠지?""그렇겠지."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을 수 있잖아. 그런데 평소랑 조금 다른 걸 가지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하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엄만 좋겠어?"(본문 38, 39, 64쪽)
<소녀의 마음>에 나오는 아이는 '어머니 집'에서 살지만 틈틈이 '아버지 집'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어머니 집에서 어머니와 늘 툭탁거리면서 마음이 다치면,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친 마음을 풉'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갈라진 뒤 아이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집은 얼마나 있을까 모르겠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갈라지더라도 아이가 스스로 씩씩하게 살도록 이끌려는 마음이라면, 아이는 '기쁜 사랑'을 생각하고 찾으면서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기쁜 사랑으로 자라고, 어버이도 기쁜 사랑으로 살림을 꾸리는 길은 '이혼은 죽어도 안 해야 하는 집'이 아닙니다. 어버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아이들한테 돈 걱정을 안 시킨대서 아이가 기쁘지 않아요. 어버이가 언제나 맛난 밥을 잔치처럼 차려 준대서 아이가 기쁘지 않아요. 아이가 눈부시게 고운 옷을 늘 입고 다닐 수 있대서 아이가 기쁘지 않아요.
겉모습이나 겉차림 때문에 기쁠 아이는 없습니다. 어른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해요. 겉을 아무리 잘 꾸민다고 해서 기쁠까요? 말끔한 옷과 번듯한 자가용을 남 앞에서 뽐내야 삶이 기쁠까요?
"오해하지는 마. 엄마, 엄마가 누굴 사귀든 그건 엄마 자유고, 그것 때문에 내 기분이 나쁘다면 그건 내가 이상한 거지. 다만 내가 조금 기분이 나쁜 건, 엄마가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거야." "뭐 어때서? 고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시집을 가든, 난 아빠랑 손 꼭 잡고 다닐 거야. 그러니까 아빠, 너무 싫어하지 마." "난 아빠 닮을래.""그러지 마." 사내가 힘주어 말했다. "가스리는 아빠를 닮지도 않았고, 엄마를 닮지도 않았어. 가스리는 가스리야."(본문 67, 77, 1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