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300>페르시아 군대의 황제 크세르크세스와 스파르타군의 치열한 전투를 그린 영화. 제라드 버틀러 주연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관대하다'라는 뜻은 한국어 사전을 보면 ▲ 마음이 넓고 남을 헤아리는 아량이 있음 ▲ 사람이 무엇에 향하는 마음이 너그럽고 크다 ▲ 죄나 허물 따위를 너그럽게 용서함 등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 '관용'이라는 단어는 어떤 뜻일까요?
관용이라는 의미 역시 '관대함'이라는 뜻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어학적 의미로는 ▲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다 등을 뜻합니다. 나를 넘어서 타인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다는 면에서는 관대함이나 관용이나 같은 의미로 많이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용이란 승자만의 전리품?그러나 관용을 베푸는 주체에 대해서는 좀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관대한 마음이나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깊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용의 정신이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곳이라면 경제적 차원이나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 사회가 실현되고 있는 곳임을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 볼 것은 우리들이 과연 순수한 마음으로 타인을 향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나와 상대방의 차이를 무시하고서 말입니다.
첫째, 나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 나보다 훨씬 나은 학력, 돈, 혹은 나와 반대되는 이권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를 관용의 정신으로 대할 수 있을까요?
둘째, 거꾸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보다 가난하고 학벌이나 사회적 지위가 낮을 뿐더러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내게 악을 저질렀을 때,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요?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이 내게 좋지 않은 일을 저질렀을 때는 '가진 놈이 더해!'라며 못난 내 인생을 한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보다 여러모로 사회적 위치가 낮은 사람이 내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약간의 여유를 보입니다.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이죠. 물론 법의 판단에 맡겨 가차 없는 처벌을 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해자에게 용서를 베푸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나와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에서 큰 차이가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대립각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건 없는 관용의 정신이 발휘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회겠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관용이 만연한 사회는, 자신의 강력한 권력을 이루기 전까지 관용이란 없습니다. 나중에 비로소 확고한 권력 헤게모니를 구축하였을 때에는 관용을 베풂으로써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칼날을 뭉툭하게 만듭니다. 지배 논리가 작용하게 되는 거죠. 이럴 때 권력자의 관용은 약자나 비판자들에게 사회적 안정이라는 기대효과, 즉 심리적 보상을 던져줍니다.
관용은 가부장적 용어! 타인을 흡수하려는 욕망?
'관행에서 벗어난 소수파의 행동에 대해 지배자나 다수파의 문화가 자기들 마음대로 기꺼이 '관용한다'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관용의 행위는 자비로운 행위나 '은혜 베풀기'와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위르겐 하버마스)'관용은 늘 '최강자의 논거' 편에 있습니다. (중략) 주권은 오만하게 내려다보면서 타자에게 이렇게 말하죠. '네가 살아가게 내버려 두마. 넌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야. 내 집에 네 자리를 마련해 두마. 그러나 이게 내 집이라는 건 잊지 마'(자크 데리다)(93쪽)하버마스의 주장처럼 관용이라는 단어가 '은혜 베풀기'와 같은 가부장적인 용어이며 자신의 권력 안으로 타인을 흡수하려는 욕망으로 시행된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권력자의 욕망이 관용의 진정한 참뜻을 호도할 수 있다는 면에서 주의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