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대원사
"생각해 보면 이상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산기도, 물기도, 바위 기도같이 심상치 않은 자연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소원을 빌고 정성을 들여 온 것이 우리네 토속 신앙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무속이 미신으로 규정되고 조직적인 탄압을 받게 된 것은 일제시대의 일이다. 일본은 이 땅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민족 정신까지 없애려는 조선혼 말살 정책을 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일본은 식민 통치 초기부터 조신 문화 특히 민속 문화에 관한 폭넓은 연구를 치밀하게 했다."(<팔도 굿> 75, 83쪽)황루시님이 글을 쓰고, 김수남님이 사진을 찍은 <팔도 굿>(대원사, 1989)을 읽습니다. 이제 한국 어디에서나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굿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만납니다.
두 눈으로 지켜보기 어려운 굿이요, 굿잔치 소리나 노래도 듣기 어렵지만, 아쉬우나마 책으로 엿볼 수 있습니다. 굿잔치에서 어떤 바람이 흐르는지 알려면 굿잔치 자리에 있어야 할 텐데, 글과 사진만으로는 더없이 아쉬운 노릇이지만, 이렇게 굿잔치를 놓고 글을 쓴 분이 있고 사진을 찍은 분이 있기에, 비록 '박제'처럼 남았다고 하더라도, 한겨레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탈춤을 추는 동향 사람이 찾아와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왔다. 김금화는 두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굿하는 무당이라고 해서 억울하게 이혼 당하고 지금껏 수모를 받으며 살고 있는데 이것이 예술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 김금화는 많은 아픔을 딛고 무당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여 이 시대의 큰무당이 된 것이다. … 인간이 신에게 보여준 정성은 결국 신을 감동시키게 된다. … 신이 인간에게 복을 내리면서 춤추고 노래하면 사람들도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굿판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고 놀게 된다."(본문 90, 91, 109쪽)황루시님과 김수남님은 '팔도 굿'을 이야기합니다. '팔도'란 '조선 팔도'를 가리킵니다. 남녘이나 북녘을 똑 뗀 굿이 아니라, 남북녘을 하나로 바라보는 굿입니다. 정치에 따라 갈린 남북녘이 아닌, 삶으로는 언제나 하나였고 한 줄기인 사람들을 바라보는 굿입니다.
북녘에서는 굿잔치를 벌일까요? 북녘에서는 굿잔치를 벌일 수 있을까요? 아마 북녘에서도 남녘과 똑같이 굿도 굿잔치도 못 벌이거나 자취를 감추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남녘은 남녘대로 제 삶길을 잊으면서 굿이랑 굿잔치를 잊는다면, 북녘은 북녘대로 제 삶자리를 잃으면서 굿이랑 굿잔치를 잃겠지요.
곰곰이 돌아보면, 굿도 굿잔치도 '마을'에서 이뤄집니다. 굿이나 굿잔치는 임금님이 벌이거나 꾀하지 않습니다. 양반이라든지 벼슬아치가 즐기는 굿이나 굿잔치가 아닙니다. 먼 옛날부터 굿이랑 굿잔치는 시골마을에서 흙을 일구거나 바다를 가로지르던 수수한 시골사람이 즐겼습니다. 들에서는 들굿을 하고, 바다에서는 바다굿을 합니다. 들굿을 하는 들사람은 들노래를 부릅니다. 바다굿을 하는 바다사람은 바다노래를 부릅니다.
그러고 보니, 궁중에서는 '궁중 음악'을 하지요. 궁중 음악은 오늘날에도 '중요 무형문화재' 대접을 받습니다. 굿노래를 부를 줄 아는 분 가운데에도 '인간문화재' 대접을 받은 분이 있지만, 아주 뒤늦게 대접을 받았습니다. 나라에서 바라보는 '문화'라는 테두리에서도, 여느 시골마을 수수한 사람들 삶노래는 '문화'가 아니었다고 여기는 셈입니다.
다 함께 춤추고 노래부는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