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순 할머니와 남편인 김보준 할아버지
김영숙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4년 8월, '여자정신대근로령'이 시행되면서 10대 초·중반의 여학생들에게 일본인 교장과 담임교사가 지원을 종용했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으며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고 '사기'치면서.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동원된 곳이 한반도와 일본의 군수공장인데, 한반도는 대표적으로 평양 조병창과 가네가후치 방적공장이다. 일본은 도쿄아사이토 방적, 미쓰비시 중공업, 후지코시 공장이다. 도쿄아사이토와 미쓰비시는 각각 300여명, 후지코시는 1000명이 넘는 어린 여학생이 동원된 것으로 확인됐다.
후지코시는 1928년 도야마시에서 창업했다. 처음엔 기계공구 제조사였지만 나중에 항공기나 군함 등의 부품을 생산하면서 군수공장으로 변했다. 전쟁 말기, 일본제국주의 입장에서 전황이 악화되면서 후지코시는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의 소녀들을 징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군부에 로비했다. 조선인 여자 징용노동자 수로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
후지코시 상표인 'NACHI(나치)'는 쇼와 일왕이 타고 다닌 배 이름이다. 현재도 기업 로고보다 나치라는 상표가 더 강조돼, 회사 이름이 '나치-후지코시'라 불린다. 기업 이름에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배고픔이 가장 서러웠다한 사람당 다다미 한 장을 배당받은 숙소에서는 한 방에 군산에서 온 50명이 함께 생활했다. 저녁이면 모두 고향 쪽을 바라보고 부모님을 생각하며 고개 숙여 '안녕히 주무시라' 인사했다.
도야마에 도착하고 한 달간은 매일 군사훈련만 했다. 오전 7시에 일어나 군복을 입고 체조나 제식훈련만 했다.
"한 달 훈련이 끝나고 나는 체구가 작아 베어링 연마 부서에 배속됐어. 동그란 다마(베어링)를 빼빠(사포)로 힘주어 눌러 반짝이게 깎는 일이었지. 키가 큰 여학생은 기계를 깎는 일인 남자들 부서에서 고생이 많았지. 공습경보가 하루에도 부지기수로 울려. 일하다가도 도망을 가야해. 저녁에 잘 때도 옷을 다 입고 배낭을 옆에 두고 잤어. 언제 공습경보가 날지 모르니까 말이야. 한 번은 경보가 울리는 것도 모르고 내가 곯아떨어졌나봐. 동료가 깨우긴 했다는데, 급하니까 그냥 나를 놔두고 나갔지. 용케 폭격을 안 당해 살았지. 일하면서도 수시로 폭격소리가 났어. 후지코시 군수공장을 폭격한다는 게 시내를 폭격해, 시내가 다 불에 타는 걸 본 적도 있어. 우리는 경보가 울리면 도야마 시골로 무조건 뛰어가. 오이나 감자밭에 숨어 있다가 배고파 오이를 따 먹기도 했지."공습경보보다 더 무서운 게 배고픔이었다. 아침은 된장국에 단무지와 한 공기도 안 되는 밥이 나왔다. 점심으로는 삼각빵 세 개를 줬다. 아침밥도 부족한 상태라 빵을 아침에 다 먹었다. 같이 일한 일본 여학생들이 불쌍하다며 가끔 음식을 주기도 했다. 어린 소녀들은 모여 앉아 울었다. 고향에 편지를 썼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미숫가루를 보내달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어린 학생들은 배가 고파, 고향에서 가져간 옷을 팔기도 했다. 전쟁 때라 옷이 귀했다. 도야마 시골 사람들에게 옷을 주면 노란 콩을 줬다. 그걸 볶아먹으며 주린 배를 채웠다. 그래도 배가 부를 리 만무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떨어진 감을 주워 먹었는데, 먹다 걸리면 혼났다.
(* 두 번째 기사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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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습경보도 두려웠지만, 배고픔이 더 무서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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