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그림
최종규
.. 고추는 어디서나 잘 자라서, 화분에 키우는 사람들도 많아요. 여름이나 가을에 골목길을 걸을 때 한번 눈여겨보세요. 어디선가 자라고 있는 고추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 (39쪽)고추나 감자나 고구마나 토마토나 배추는 모두 이웃나라에서 들어왔습니다. 지구별은 커다란 마을과 같아서, 이쪽 마을(나라)에서 자라던 남새가 저쪽 마을(나라)로 살며시 퍼집니다. 천천히 퍼지기도 하고, 배에 실려 어느 날 문득 퍼지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몹시 낯설어 할 만하고, 시나브로 새로운 삶이 되어 뿌리를 내립니다.
요즈음은 고추밭에 비닐을 씌우는 사람이 많습니다. 비닐을 씌우지 않고서는 고추를 기르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추밭에 짚을 까는 사람이 있으나, 애써 짚을 깔려는 사람은 드뭅니다. 고추밭을 거느리면서 농약을 안 쓰는 사람이 드뭅니다. 고추를 처음 들여온 날부터 새마을운동이 퍼지기 앞서까지는 이 땅 어디에도 농약바람이 안 불었으나, 이제는 농약이 없이는 벼도 콩도 고추도 못 기르겠노라 하고 여깁니다.
아무래도 벌레가 먹으니 농약을 쳐야 한다고 여길 텐데, 풀잎이나 풀알에 벌레가 먹는 까닭은 '풀벌레가 갉아먹을 잎이나 알'이 없기 때문입니다. 풀벌레가 갉아먹을 다른 잎이나 알이 있으면 굳이 고추알이든 다른 풀알이든 갉아먹지 않습니다. 밭자락에 몇 가지 씨앗만 심고서 다른 풀은 모조리 뽑거나 베거나 약으로 죽이니, 풀벌레로서는 사람이 키우려는 남새만 갉아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풀벌레는 왜 논밭에서 함께 자라려 할까요? 풀벌레는 풀잎을 먹으면서 꽃송이도 드나들어 꽃가루받이를 해 줍니다. 조그맣게 피는 꽃에는 조그마한 풀벌레가 오락가락하면서 꽃가루받이를 하지요. 벌과 나비만 꽃가루받이를 하지 않아요. 작은 풀벌레와 개미도 꽃가루받이를 합니다. 그리고, 나비가 되자면 애벌레가 풀잎을 오랫동안 갉아먹고 자라야 해요.
도시에도 논과 밭이 있어서 아이와 어른 누구나 논밭을 마주할 수 있으면, 어디에서나 싱그러운 바람이 불리라 생각합니다. 건물만 쑥쑥 올라가고, 자동차 둘 자리를 넓히는 데에만 마음을 쓰는 도시인데, 조그마한 땅뙈기에 씨앗을 심을 수 있다면, 집안에라도 꽃그릇이나 텃밭상자를 마련해서 기를 수 있다면, 이리하여 도시에서도 콩이나 고추를 손수 기르면서 삶과 숲과 밥과 지구별을 헤아린다면, 이웃을 한결 넓게 사랑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습니다.
잘 익은 고추알을 즐기고 빨간 고추장을 누리면서 생각을 넓힙니다. 이 맛난 먹을거리와 양념이 우리 곁에 오기까지 얼마나 기쁘게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머금으면서 흙숨을 받아들였는가 하고 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