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들장 논이 있는 양지리 마을을 지나다 마주친 귀여운 개.
김종성
청산도에는 돌이 많다보니 물이 고이지 않기 때문에 농사를 짓기 위해 돌을 깐 것이다. 돌 위의 흙은 기름지지 않아 매년 퇴비해야 했다. 지금도 그리 넉넉지 않지만 청산도에는 항상 쌀이 모자랐다. 돌이 너무 많아 농사를 부칠 땅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청산도에서 나고 자란 처녀가 뭍으로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만 먹고 가면 부잣집"이라는 말이 있었을까. 구들장 논 마을에서 태어나 논을 일구다 논 곁에 묻힌 어느 소박한 무덤가 동자석의 미소가 짠했다.
구들장 논은 문화 인류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에서 최초로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세계 농업 유산으로 인정받았다. 규모는 인증 기준에 못 미치지만, 400년이 지난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고, 청산도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까지 고려한 결정이었단다. 청산주민의 땀과 지혜로 느리게 일궈낸 애잔하고도 아름다운 풍경 속을 힘든 줄 모르고 걸었다.
구들장 논이나 다랭이 논을 지나가다 보면 묘비 없는 무덤을 흔히 볼 수 있다. 땅이 없는 가난한 어부들이 죽어 바닷가에 묻히듯, 섬 마을 농부들은 평생 일구던 논밭 가에 소담하게 묻혔다. 청산도의 봄은 그런 무덤들마저 평화롭게 만들어 주었다. 거창한 묘비 대신 푸른 보리밭과 유채꽃이 감싸고 있는 무덤은 죽음이 갖는 어둠의 단절과 멀어 보였다.
오히려 죽음이란 바람이 불고, 해와 달이 뜨고 지며, 밀물과 썰물이 들고 나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순리처럼 느껴졌다. 비석도 없이 논밭 주변에 봉긋 솟은 무덤들이 제주의 오름처럼 순박하고 정답게 다가왔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담담히 빛나던 섬 사람의 밝은 안색과 자연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양지리 마을에서 지팡이를 들고 '산보' 나온 할머니를 만났다. 수백 살 먹은 고목 그늘 아래 정자에 앉아 마을 이야기부터 대처로 간 자식 자랑까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셨다. 과연 내 어머니는 다른 이에게 나를 이렇게 자랑하실까, 반성하는 마음으로 할머니와 얘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처음 보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경계하는 빛이라고는 없었다. 수 년 간 살았어도 이웃 사람 이름은커녕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도시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에겐 이질적이고 또 정겹기만 했다.
지금은 2000명을 조금 넘지만 한 땐 주민 1만여 명을 헤아리던 청산도였다. 어획량, 인구의 감소로 어업자와 어부를 고객으로 한 각종 상행위가 이루어지는 파시(波市)에 이어 오일장도 사라지면서 폐교도 속출했다.
근래 폐교는 섬의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다. 느림의 미학을 실현하는 너른 운동장이 있는 숙식, 체험 시설인 '느린 섬 여행 학교'는 누가 봐도 중·고교 자리다. 완도군에서 운영,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시설이라 숙식비가 비교적 저렴하다. 자전거로 섬을 여행할 수 있게 전기 자전거를 대여하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