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창비
평행선처럼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이 두 질문을 하나로 연결하는 키워드가 있었다. 나는 정신의학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와 진은영 시인의 대담집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를 읽고 그 실마리를 찾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트라우마,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으며 트라우마를 치유해나가는 유가족과, 미처 치유하지 못한 트라우마를 안고 인간성을 잃어버린 정치를 펼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이 둘의 극단적인 대비를 통해 트라우마의 치유가 개인은 물론 사회의 건강과 평화를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 수 있다. 또한 트라우마에 대한 무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 책에서 얻은 큰 소득이었다.
트라우마는 '뚫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전쟁터에서 방패를 뚫을 만큼 강력한 외부 자극이 만들어 낸 마음의 상처라는 뜻이다. 그렇듯 트라우마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59쪽) 우리는 일상에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별다른 구별 없이 혼용해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정혜신 박사는 "스트레스는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지만, 트라우마는 아픈 만큼 파괴되는 것"이라며 "트라우마의 핵심을 이해해야 합니다. 트라우마의 핵심은 죽음 각인이에요. 고부간의 갈등 같은 스트레스와는 달리 성폭행이나 쓰나미, 전쟁 같은 트라우마는 거의 죽음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경험이기 때문에, 죽음이 생애 어느 순간보다 생생한 리얼리티로 각인되는 거예요"(64쪽)라고 설명한다.
또 스트레스는 부분적인 문제이지만 트라우마는 삶이 전면적으로 파괴된다. 공황 장애와 같은 스트레스를 겪으면서도 직장 생활은 가능한 데 반해, 트라우마는 삶 전체가 붕괴되고 모든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는 재앙과도 같은 것이다.
이웃과 함께 하는 트라우마 치유의 '좋은 예'지난 4월 CBS와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가 발행한 '세월호 유족 최초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유가족 152명에 대한 설문 결과 55.3%가 '죽고 싶은 생각'을 한다고 답했다. 세월호 유가족의 자살 충동률은 55%로 일반인보다 10배나 높았다. 비슷한 예로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1위인데 '광주 5.18 피해자들의 자살률은 우리나라 평균 자살률의 거의 500배가 된다'고(76쪽) 한다.
세월호 유가족의 시간은 2014년 4월 16일에 멈췄다. 삶의 정지 상태다. 진은영 시인은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은 고통의 러닝머신을 계속 뛰는 셈이네요. 멈출 수도 없고 내려올 수 없고요.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멀어져 보려고 하는데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니까"(66쪽)라고 비유한다.
안산에 마련된 치유 공간 '이웃'에서는 유가족이 모여 자원 봉사자나 지역 주민과 함께 집밥을 해 먹고 뜨개질을 하며 파괴된 일상을 보듬고 있다. 삶을 위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것, 인간의 생존과 안정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심각하게 훼손돼 있는 것을 다시 구현함으로써 건강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치유는 아주 소박한 것입니다. 사람 마음을 어떤 순간에 살짝 만지는 것, 별것 아닌데 사람이 휘청하는 것, 그냥 울컥하는 것, 기우뚱하는 어떤 순간. 그것이 바로 치유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치유자가 될 수 있어요. 더구나 지금과 같은 때는 더 그렇죠.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 그 상처를 치유받아본 경험을 통해서 최고의 치유자가 된다는 거예요. (중략) 4월 16일 이후 안산에 계신 분들은 가장 탁월한 치유자가 될 수 있는 운명에 던져지셨다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이 지역 공동체가 시민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에서 가장 고통의 순간에 처한 이웃에게 가장 좋은 치유자들이 되어주는 이웃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250~251쪽)정혜신 박사의 설명을 듣다 보니 안산에 '이웃'이라는 치유 공간이 있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 희생자가 304명, 각 희생자별로 유가족을 세 명씩만 헤아려도 무려 1천 명을 육박하는 숫자가 나온다. 여전히 많은 사람은 치유를 받지 못하거나, 혹은 치유 받는 것마저 죄스러워 거부하는 죄책감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상처입은 이들이 모두 치유를 받을 수 있도록 국가적 지원과 사회적 배려가 절실하다. 대재난을 탐사하고 연구한 리베카 쏠닛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책에 인용돼 있다.
"재난은 그 자체로는 끔찍하지만 때로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우리가 소망하는 일을 하고, 우리가 형제자매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는 천국의 문 말이다." (169쪽)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는 번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