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비릉과 오른쪽의 파사탑 비각
정만진
가야연맹의 종주국 노릇을 해온 금관가야가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되면서 낙동강 주변의 패권은 대가야로 넘어간다. 결국 금관가야는 527년(법흥왕 년)에 이르러 마침내 신라에 합병된다. 그런데 고구려에 의해 사실상 멸망의 길을 걷게 된 금관가야의 몰락은 세 나라 중 가장 약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게 되는 데에 재정적, 군사적 밑거름이 된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해왕(구형왕)의 세 왕자 중 한 명인 김무력은 뒷날 신라가 처음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다. 신라의 한강 유역 차지는 중국과 직통하는 길을 열었고, 비옥한 광야를 차지하여 경제적 힘을 비축했다는 점에서 통일의 토대가 되었다. 또 김무력은 백제 중흥의 기치를 높게 들었던 성왕을 전사시킴으로써 백제에 비해 신라가 확실히 우위에 올라서는 전기를 구축했다. 게다가 무력의 아들은 김유신이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백제를 진압해준 것도 신라가 강성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워낙 강대국이었던 고구려는 중국과 맞상대를 하는 데 전념했으므로, 삼국 중 나머지 두 나라인 백제와 신라는 둘이서 싸우느라 세월이 가는 줄 몰랐다. 곡창 지대를 차지한 백제가 처음부터 신라보다는 한 수 위였다. 그래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가끔 고구려와 맞상대가 되려고 했고, 줄곧 신라를 공격했다. 그런 백제를 장수왕이 밀고내려와 서울을 함락시키고 임금을 주살하는 등 세력을 크게 위축시켜주었다. 그 틈을 타고 신라는 일취월장으로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경남 산청의 구형왕릉도 필수 답사지
가야 여행의 대표지는 경북 대가야읍과 경남 김해시를 들 수 있다. 대가야읍에 남아 있는 대가야 유적으로는 주산 고분군이 압도적 권위를 자랑한다. 고분군 아래에 만들어져 있는 왕릉체험관과, 가야 고분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벽화를 거느린 고아동 고분도 있다. 그러나 고아동 고분은 평상시 그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일반인은 내부를 볼 수 없다.
김해시에는 금관가야의 개국 신화를 대변하는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 앞의 파사탑, 우리나라 최초의 집단 노동요로 평가받는 <구지가> 신화의 구지봉 등이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김해에서 멀리 떨어진 산청에 남아 있는 '전 구형왕릉'도 빼놓을 수 없는 금관가야의 유적이다. 이 무덤에 '전'이 붙은 것은 '그렇게 전해진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