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가 생활하던 방. 간디 슴리띠에 전시되어 있다.
Dustin Burnett
그럴 돈은 또 없다. 검고 깨끗한 서류 가방을 든 두 아저씨의 손가락에는 두껍고 묵직한 반지가 여러 개 달려 있었다. 우리는 돈 좀 있는 아저씨들이 델리행 버스 티켓을 어디서 구해올까 싶어 아저씨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시간이 더 지났다.
"델리 가요?"두 시간 후. 하염없이 흐르기만 하는 시간에 정신이 아득해갈 무렵, 남색 두건을 두른 시크교 남자가 다가왔다.
"저쪽에서 지금 델리 가는 표를 팔고 있어요." 남자가 가리키는 곳은 200m 앞 간이 테이블. 테이블 앞으로 이미 100여 미터의 긴 줄이 달려 있었다. 나는 배낭을 지키기로 하고 더스틴을 보냈다. 버스가 몇 대나 가는 걸까. 저렇게 많은 사람이 다 탈 수나 있으려나. 나는 200m 앞에 선 더스틴의 작은 등짝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마치 열심히 노려보면, 앞선 줄이 줄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아직 못 샀죠? 그러지 말고 우먼 큐(Women queue)에 가서 줄을 서요."시크교 남자가 다시 내게로 왔다. 인도에서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배려해 여성만 설 수 있는 줄을 따로 둔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간이 테이블 앞에 뱀 꼬리처럼 길게 이어진 줄을 장식한 사람들은 모두 남자. 나는 테이블로 달려갔다.
"가방이요! 가방!"아, 가방. 표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배낭을 지킨다는 첫 번째 의무를 깡그리 잊어버렸다. 나는 다시 배낭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배낭을 메고, 내 배낭보다 두 배는 무거운 더스틴의 배낭을... 들고는 싶었으나 차마 들지 못하고 힘만 끙, 하고 줬다.
"이런 데 배낭을 두고 가면 당장 훔쳐가요. 조심해야 해요."시크교 남자가 돌아와 더스틴의 배낭을 들고 앞장섰다. 나는 남자를 따랐다. 순간 코가 시큰하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착해. 우먼 큐에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여자가 표를 샀다. 간이 테이블에 앉은 직원은 줄을 선 남자 세 명에게 표를 주고는 나를 흘끔 쳐다봤다. 그리고는 다시 줄 선 남자들을 상대했다. 어라. 저 안 보입니까 저? 제가 여자로 안 보입니까? 또 싸워야 합니까? 나의 영웅 시크교 남자가 돌아왔다.
남자는 이곳 직원인지, 표를 구하는 승객인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무지하게 바쁘다는 거였다. 남자는 총명한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버스 터미널의 여기저기를 휘젓다가,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없는 내 곁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뻔히 버스 직원에게 무시당하고 목소리 큰 인도 남자들의 힌두어에 눌려 입도 뻥끗 못 하고 직원의 옆 얼굴만 노려보고 있는 나를 대신해 남자는 직원에게 내 표를 달라고 대신 소리쳤다. 직원이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로 표를 두 장 내밀었다. 줄을 선 남자들이 웅성댔다. 시크교 남자가 다시 소리쳤다. "잔돈을 주시오!" 잔돈이 돌아왔다. 다시 한 마디. 표에 좌석 번호가 적혔다. 더스틴은 아직 뱀 꼬리의 끝에 속수무책으로 서 있었다. 보이냐! 표를 구했다! 델리 티켓 포 두! 델리행 티켓 두 장이요!
"고마워요. 정말 너무 고마워요."너무 고마운 나머지 간을 꺼내 조금이라도 떼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내 간 따위 받아봤자 쓸모도 없을 테고. 우리는 고맙다는 말만 무한 반복 했고, 남자는 별 거 아니라며 다시 바쁜 걸음으로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버스에 올랐다. 제일 뒷자리다. 조금만 늦었으면 터미널에서 밤을 새울 뻔했다. 내일부터 파업이라니, 내일이라고 버스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고마워요. 시크교 청년. 네 명이 나란히 앉게 되어 있는 버스 뒷좌석에 앉아, 나는 피곤한 고개를 떨어뜨리며 암리차르와 델리 사이의 어디쯤을 달리고 있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남편도 못 알아보는 고개가 자꾸 더스틴이 아닌 왼쪽 인도 아저씨의 뾰족한 어깨 쪽으로 넘어갔다. 구성진 라이브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떴다.
날이 밝아있다. 델리다. 같이 택시를 타고 가자던 아저씨 두 명도 버스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아저씨 한 명이 더스틴의 팔을 붙잡았다. 더스틴이 팔을 뿌리쳤다. 기차에서, 버스에서 내리기만 하면 수십의 릭샤꾼들이 몰려오는 인도다. 기차나 버스에서 내리면 누가 불러도, 누가 만져도 개의치 않고 무조건 직진하는 것, 인도에서 5개월이란 시간을 보내며 생긴 자동 반응이다.
"아 죄송해요. 모르는 사람인 줄 알고."더스틴이 멋쩍게 사과했다. 아저씨를 호객꾼으로 오해한 게 미안해서. 호객꾼이라면 무례하게 팔을 뿌리쳐도 된다고 잠시 생각한 게 또 미안해서.
"어디로 가요? 같이 릭샤 탈래요?"빠하르 간지 쪽으로 간다는 아저씨들과 오토릭샤에 마주앉았다. 순하게 생긴 키 작은 아저씨는 아들, 딸이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래서 델리를 찾은 우리를 반갑다고 했다. 우리는 호주 뉴질랜드와 아무 상관도 없는데.
빠하르간지까지는 100루피. 더스틴과 나 둘만 탔다면 어림도 없었을 현지인 요금이다. 돈을 내겠다는 우리 요청을 아저씨들이 극구 사양했다. 어제부터 이상하다. 인도는 이런 데가 아닌데. 인도 사람들은 이렇지 않은데. 인도가 헷갈린다.
델리의 여름은 실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