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형 숲 유치원을 만들어가는 장정수씨
매거진군산 진정석
"여자 친구 따라왔어요?"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학생들은 정수에게 물었다. 당연한 질문일 수도 있다. 그가 들어간 대학은 군산 서해대학 유아교육과. 전체 183명 중 남학생은 3명이었다. 그것도 반마다 한 명씩 흩어져 있었다. 손 유희만 배우는 시간이 있고, 율동을 하는 강의실이 따로 있었다. 교수님이 새로 만든 율동을 가르쳐주면 친구들은 진지하게 배웠다. 정수는 도망치고 싶었다.
정수는 군산 남중을 다니면서 기타를 배웠다. 교회에서 기타 연주할 사람이 필요하대서 기타 학원에 간 거다. 사춘기 소년 정수는 곧장 기타와 베이스에 빠졌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음악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그 친구들이랑 밴드를 결성했다. 학교에서는 음악 연주할 공간을 주고, 행사에 초대 받으면 공연 가라고 수업을 빼줬다.
"지도 선생님이 차에 직접 악기와 앰프를 실어서 공연하는 곳까지 날라 주셨어요. 그때 저희가 주로 했던 곡이 신성우의 <서시>,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 <밤이 깊었네>였어요. 밴드에서 보컬 하는 애가 노래를 진짜 잘했어요. 공연비도 받았는데 그걸로 악기를 샀고요. 저랑 친구들은 평생 음악할 거라고 생각했죠. 다른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요."정수는 백제예술전문대학에 원서를 썼다. 실기 시험이 다가오는데, 부모님은 "절대 안 돼. 음악은 취미로만 해!"라고 했다. 완강했다. 정수가 부모님의 마음이 돌아서기만 바라는 동안, 각 대학의 음대 입시는 끝났다. 원서 접수를 늦게 받는, 부모님이 권하기도 하는 유아교육과만 자리가 있었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과에 진학한 것, 정수 인생의 첫 번째 실패였다.
음악을 하고 싶었던 청년, 유아교육과에 가다 서해대 유아교육과에는 정수의 소꿉친구 비아가 있었다. 강의실에서 스스럼없이 말 붙일 수 있고, 등·하교도 같이 하는 비아가 있어서 다른 친구들과도 어울렸다. '이 애들이 나를 남자로 보겠지'라는 착각에서도 빨리 깨어났다. 그래도 유아교육과에 다니는 일은 힘들었다. 동요에 맞춰 단체로 율동하는 일은 가장 적응이 안 됐다. 한 학기 내내 그랬다.
"1학년 여름 방학 때, 어린이집에서 보조 교사를 했거든요. 그때 제가 애들을 엄청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영부영 자격증만 따서 나가면 될 일이 아니란 것을 알았죠. '잘 배워야지'라고 생각했어요. 유아교육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거예요. 그래도 어린이집 일은 힘들죠. 막판에는 뇌수막염에 걸렸어요. 앓아 누워서도 유아교육의 보람을 알게 돼서 좋았어요."
2학년을 마친 정수는 육군 중에서 가장 힘들다는 '81밀리 박격포'에 지원했다. 자대 배치 받고서야 좀 후회했다. 사람이 들고 다니는 무기 중에서 가장 무거운 박격포는 42.5kg. 세 명이서 나눠 든다. 계급이 높을수록 무거운 무기를 든다. '경험도 재산'이라는 생각을 가진 정수는 협동을 배우는 부대 생활이 좋아졌다. 힘든 일이 많아서 곱씹을 추억도 많다.
정수씨는 3학년 때 야간 대학으로 복학했다. 낮에는 율동 하나에도 온몸을 쓰며 하는 유아체육 교사를 했다. 전주, 익산, 군산, 서천, 김제, 정읍에 있는 유치원의 운동회나 발표회, 캠프를 진행하고 다녔다. '최대한 많은 일을 보고 겪자. 좋은 것만 배워가자'는 생각으로 7년 동안 일했다. 대학원에 가서 유아 교육을 더 깊게 배우려고, 방송통신대학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유아 체육을 하면서부터 유아 기관 설립하는 꿈을 갖게 됐죠. 유치원 교사로 일하면서 진짜 현장을 배우고 싶었어요. 그때 어린이집 유아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거든요. 제가 출근하기로 한 유치원에서 '남자니까 오지 말라'고 했어요. 낙담했는데 모교 교수이기도 한 문화어린이집 김신덕 원장님이 '유아교육 현장에는 남자가 필요하니까 와!'라고 했어요." 2012년 3월, 어린이집 정교사로 취직한 정수씨는 여자 선생님과 둘이서 다섯 살 반 22명을 맡았다. 반 아이들은 정수씨를 '어린이집 아빠'로 불렀다. 자연스럽게 여자 선생님은 '어린이집 엄마'가 됐다. "교사가 발전하면, 우리 아이들한테 더 좋지요"라는 김신덕 원장은 교사들이 학교 다니는 걸 장려했다. 정수씨도 군산대학교 유아교육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김신덕 원장은 교사들을 존중하는 만큼 요구도 정확했다. 오로지 아이들한테만 집중하기를 바랐다.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교사들은 핸드폰을 쓸 수 없다. 서류 정리나 교실 청소도 아이들이 돌아간 뒤에 해야 했다. 법인 어린이집이라서 감사 받는 횟수가 많다. 민간 어린이집보다 업무량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교사들은 대부분 장기 근무를 했다.
정수씨는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면서 히브리어로 지혜라는 뜻의 '호크마' 교육을 알았다. 놀면서 배우는 공부. 총신대 김정희 교수한테 호크마를 배우려고 2년간 서울을 오갔다. 아동 상담사 자격증도 땄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점점 넓어진다는 걸 느꼈다. 어린이집에서 일하면서도, 유아교육 관련 공부를 계속 해나갈 힘이 생겼다.
전국의 '숲 유치원'을 돌아다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