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참사 1주기를 맞아 1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이 세월호특조위 시행령 폐지와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집회를 마친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집결하자 경찰이 물대포와 차벽으로 가로막고 있다.
권우성
어느덧 일 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는 대한민국. 세월호 관련 문화제에 굳건한 삼중차벽이 다시 나타났을 때 공간 디자이너인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은 윈스턴 처칠이 했던 유명한 말이었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 이 말에 의하면 건축공간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상당 부분 조정할 수 있고 이는 비단 건축 공간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머무는 대부분의 공간에 해당된다. 도시나 건축, 실내공간을 관찰하다보면 처칠의 말이 결코 틀리지 않음을 수시로 확인할 수 있다. 공간의 문제점을 긍정적으로 해결한 곳에는 인구수나 구성원의 변화가 전혀 없음에도,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거나 때론 범죄율을 낮아지는 결과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간의 형태를 통해 공간을 의뢰한 사람이나 디자인을 한 사람의 심리를 비교적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다. 공간이 우리를 배려하는지 배척하는지, 자유롭게 하는지 통제하는지, 위로하는지 협박하는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 권력을 가진 자들은 공간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대중을 통제하려 했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권력자일수록 필요 이상으로 규모가 크고 권위적인 형태를 가진 건축물을 짓고 싶어 했다. 그리고 나는 늘 그것이 두려움에 대한 과잉반응이라고 생각해 왔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과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자신의 통제 범위 밖의 일이 일어날 때, 혹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 일어날 때 두려움을 느낀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면 과도하게 상대방을 겁박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므로 겁박의 크기는 두려움의 크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분향소로 향하는 시민들이 왜 두려운가서울광장에서 문화제를 마치고 광화문 분향소로 향하는 길에 나타난 삼중 차벽. 그것은 차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자의 두려움이었다. "여러분들은 지금 시민들의 안녕을 방해하고 있다. 도로점령은 불법이니 곧 해산하라"는 경찰의 반복적인 안내방송은 그 두려움을 청각적으로도 들려줬다.
화염병이 아닌 국화꽃을 들고, 희생된 아이들과 같은 또래의 아들딸과 함께 분향소로 향하는 시민들이 왜 두려운가? 두렵지 않다고 스스로 속이지 말고, 두려움의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왜냐하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두려움의 정체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깊이 생각해야 알 수 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해 보길 바란다. 지금은 살아 있는 우리 모두, 결코 멀지 않은 미래에 이미 별이 된 세월호의 아이들과 같은 길 건너가 하늘나라에서 만난다. 그 때도 두렵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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