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책 표지
윌컴퍼니
창조의 사전적 의미는 '전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다는 것은 인간이 신적 존재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에게 통용되는 창조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기존의 것을 계승하면서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기존의 것을 탈피해 도리어 전복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중 하나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의 여러 작품 중 대표 격인 <최후의 만찬>도 그의 완전한 창작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당시 "15세기 중반에 들어 르네상스 회화의 중심지, 즉 원근법이 탄생한 도시 피렌체에서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는 단골 그림으로 등장(13쪽)"했던 일화인 '최후의 만찬'의 내용을 차용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위대한 것은 기존에 통용되고 있었던 일화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다르게 표현했다는 것에 있다. 당시 통용되던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배신자 유다는 배신하지 않은 다른 제자들과 구별될 수 있도록 식탁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기존의 통념을 답습하지 않았다.
그는 "주저 없이 유다의 위치를 다른 제자들 사이로 옮겨 놓았다, (중략) 레오나르도가 생각하기에 이 그림의 핵심은 '마음의 동요'였다, 그래서 그는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동요를 놀라움, 두려움, 사랑, 고뇌, 배신자에 대한 분노 등이 잇달아 표현되는 '안무'로 연출해냈다, (중략) 가운데서 유다는 멈칫하며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16쪽)"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사례처럼 대부분의 창작은 재창작이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그림도 회화를 완결할 수는 없고, 어떤 작품도 그 자체로만 완결되지는 않는다, 각각의 창작품은 다른 창작품을 변조하거나 개선하거나 재창작하거나 먼저 창작한 것에 해당한다, 창작은 기득권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이며, 정해진 수명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7쪽)"
Input이 곧 Output이다파블로 피카소는 1934년에 "화가란 결국 무엇인가? 남들이 소장하고 있는 마음에 드는 그림을 자기도 갖고 싶어서 직접 그려 소장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시작은 그러한데 거기서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7쪽)"라는 말을 남겼다. 예술가는 결국 가장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다르게 '보는'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예술가들이 선대의 것을 끊임없이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존의 것을 토대로 놓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계승하거나 탈피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이는 기존의 것이 전제돼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창작자에게 있어서 경험이란 Input(투입)이 없다면 창작이라는 Output(산출)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의 예술가들이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경험해야만 하는 기존의 것이 너무 늘어난 탓이다.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예술가를 알고 그들의 작품을 보기란 요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도 정진해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에 등장하는 모든 예술가와 예술 작품들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앙드레 말로가 <침묵의 소리>에서 주장했듯 '예술은 형식으로 다른 형식을 정복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저런 형식을 '재량'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작업이 예술인 셈이다.(7쪽)" 정복하기 위해서는 정복하려는 대상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진리다. 이 진리가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에서 얻은 달콤하면서도 쓴 수확이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윌컴퍼니(WILLCOMPANY),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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