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나라의 군인들. 중국 북경의 군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양왕이 도성을 버리고 정나라로 도망간 행위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공자는 "천왕(천자)이 나가서 정나라에 거하셨다(天王出居于鄭)"라고 기술했다. 양왕의 몽진을 '나가다(出)'로 표현한 것이다.
정나라는 주나라 천자가 떼어준 땅에 세워진 제후국이다. 정나라도 크게 보면 주나라의 일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주나라 천자가 정나라에 가는 것은 결코 '나가는' 행위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서 정나라는 '외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자가 제후의 나라에 가는 것은 위에서 소개한 <예기>에서도 인정된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공자는 양왕의 몽진을 '나가다'로 표현했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양왕의 몽진에 대한 공자의 불편한 심기가 담겨 있다. <춘추> 해설서인 좌구명의 <춘추좌씨전>에서는 공자가 '나가다'로 표현한 이유를 이렇게 풀이했다.
"'천자가 나가서 정나라에 거하셨다'고 기록한 것은, 동생이 일으킨 난리를 피해서 달아났기 때문이다."'동생이 일으킨 난리를 피해서 달아났기 때문'이라는 구절 속에는, 천자가 동생 하나도 다스리지 못해 동생의 반란을 자초하고, 도성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비난의 뜻이 담겼다. 왕비와 동생의 배신을 자초하게 된 과정의 지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공자가 양왕의 몽진을 '나가다'로 표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천자가 자신의 직무와 책임을 고수하지 못하고, 영역 밖으로 나간 행위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속뜻을 '출(出)'이라는 글자에 담았던 것이다.
또 다른 <춘추> 해설서인 <춘추곡량전>에서는 '나가다'란 표현을 쓴 이유를 좀 더 직설적으로 풀이했다. 이 책에서는 "'나가다'라고 한 것은 천하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천자가 나갔다'라는 표현 속에 '천자가 천하를 잃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해설한 것이다. 그만큼 천자의 몽진이 무책임·무능력한 일로 인식됐다.
양왕도 자신의 몽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정나라에 몽진해 있는 동안에 상복을 입고 있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업인 천하, 즉 나라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상복을 입고 있었던 셈이다.
군자가 급할 때 몽진했다가, 상황이 수습된 뒤 돌아오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몽진에서 핵심적인 것은 군주의 '몸'이 도성을 떠나는 게 아니다. 군주의 '정신'이 도성을 떠나는 것이다. 양왕의 몽진에서 핵심은 무책임과 무능력이다. 그의 몽진이 부정적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군주가 존경을 받는 것은 군주가 강해서가 아니다. 돈이 많아서도 아니다. 잘나서도 아니다. 그것은 군주가 자기 책임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몽진을 하게 되면, 군주는 백성들의 존경을 잃고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양왕의 경우도 그랬다. 그의 몽진은 곧바로 '레임덕'으로 이어졌다. 정나라에 몽진해 있는 동안, 양왕은 강력한 제후국인 진(晋)나라의 문공에게 도움을 구했다. 진(晋)나라는 낙양 북쪽에 있는 나라로서, 진시황의 진(秦)나라와는 다르다. 양왕은 진나라 통치자인 문공의 힘으로 희대를 몰아내고 낙양을 되찾았다. 하지만 양왕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세상에 공짜 뇌물이 없듯, 공짜 파병도 없는 법이다. 양왕은 진문공의 군대를 사용하는 대신, 그에게 정치적 주도권을 넘겨줘야 했다.
양왕은 자신이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해야 했다. 기원전 632년, 문공은 천토(踐土)라는 곳으로 자기를 만나러 오라고 양왕을 불렀다. 천토는 지금의 하남성(허난성) 신향시에 속한 곳으로,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제후가 천자를 오라 가라 했으니, 몽진으로 인해 양왕의 위상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주나라 양왕의 몽진은, 중국 고대사에서 두고두고 부정적 평가의 대상이 됐다. 하필이면 훗날 위대한 사상가가 될 공자가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바람에, 공자의 <춘추>를 읽는 사람들은 모두 양왕의 몽진을 알게 됐다.
세월호 참사 같은 중대 국정현안에 대해 대통령이 최선의 노력을 하지 않고 정치적 몽진을 감행했다. 양왕의 몽진에 대한 고대 중국인들의 평가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는 스스로 나라를 버리고 '나가는' 것인 동시에 '천하'를 포기하는 행동이다.
이런 통치자의 5년이 어떻게 평가될 것이며, 나머지 3년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나갈' 것인가? 그래도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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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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