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자료관에는 소록도 갱생원시절 한센인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전시돼있다.
심명남
전남 고흥군 작은 섬, 소록도. 어린 사슴모양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여행객들에겐 아름다운 섬이지만 한센인들에겐 유배지이자 감옥. 살아서는 나갈 수 없는 땅.
나병, 문둥병, 천형병(天刑病)이라고 불렸던 한센병. 전염되지도 않고 신체접촉으로도 감염되지 않는 병이지만, 한 번 걸리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6년 조선총독부는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 격리·수용시설을 만든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소록도병원에서는 전염병 예방과 우생학적 이유를 들어 단종(斷種)정책을 실시했다. 어디 일제뿐이랴. 대한민국도 한센인 보호를 명분으로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앗아가 버렸다.
소록도, 일제강점기부터 한센인들 격리 수용 1947년생인 정유창(가명)씨. 열 일곱 되던 해 갑자기 손발에 감각이 없어졌다. 얼마 안 가 이번엔 손발과 얼굴에서 살점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늦은 밤 안방에서 연신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와 그 옆에서 어머니가 흐느끼는 모습을 엿보았다.
"세상에, 유창이가 문둥병이라니. 불쌍해서 어쩌면 좋아요." 어린 유창은 다음날 집을 나갔다. 구걸과 막일로 하루하루 버텨갔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외모 때문에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였으니. 병을 옮긴다, 흉측스럽다, 재수없다. 돌팔매질에 욕설이 날아왔다. 식당도 이발소도 들어갔다 쫓겨나기 일쑤였다. 정씨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부산에서 단속반에 잡혀 소록도로 끌려왔다.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첫날부터 스무 날을 몸둥이 찜질을 당하고 풀려났다. 그때가 1973년, 그의 나이 27살이 되던 해였다.
1951년생 박소녀(가명)씨. 열 여섯 꽃다운 나이에 얼굴이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얼굴을 싸맨 채 빨래터에 빨래를 하러 갔는데 아낙들이 모두 자리를 피한다. 벌써 동네에 소문이 퍼졌다. 며칠 후 마을 장정들이 집에 몰려왔다. "문둥이와 같이 살 수 없으니 얼른 나가!" 그리고 집을 부수기 시작했다. 간신히 몸을 피한 박씨 가족들은 정처없는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박씨는 손가락질 받으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짐이 되기도 싫었다. 1975년 녹동항에서 소록도행 배를 탔다.
정유창과 박소녀, 처지가 비슷한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다. 그리고 살가운 사이가 됐다. '우리끼리라도 서로 아껴주고 영원히 사랑하자.' 한 살림을 차린 두 사람에게 이듬해 아이가 생겼다. 하늘의 축복인가. 아니다. 재앙이었다. 소록도 한센인들은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출산의 기쁨은 '정상인'이나 누릴 수 있는 호사라는 걸 왜 몰랐던가.
병원 직원이 찾아왔다. "안 되는 거 알면서, 왜 임신했어?" 직원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아이를 지우거나 아니면 섬 밖으로 나가거나. 박씨는 바깥 세상에서 살 길이 막막했다. 뭇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견딜 자신도 없었다.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의사도 아닌 남자 직원이 마취제를 놓고 아기를 지웠다. 박씨는 하염없는 눈물만 흘렀다.
정씨도 무사하지 못했다. 아내와 함께 살려면 정관수술을 받아야 했다. 단종대에 오른 정씨는 수술칼의 고통보다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게 된 슬픔에 몸서리쳤다. 그날 밤 정씨는 아내를 안고 통곡했다.
두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단 하나, 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 시인 한하운의 시구처럼 "죄명은 문둥이…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었다. 30년이 지난 일이지만 두 사람에게 그날의 치욕은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정관절제술 조건으로 동거 허용, 임신시 낙태 권유소록도병원에선 수십 년간 강제노역, 감금과 폭행 등 인권침해가 일상으로 벌어졌다. 하지만 그건 약과였다, 2세 출산을 못하게 한 단종정책에 비한다면. 소록도병원은 초기부터 남편이 정관절제수술을 하는 조건으로 부부동거를 허용해 왔다. 혹시라도 여성이 임신을 하면 낙태를 권유했다. 말이 권유였지 사실상 강요였다. 국가가 한센병 환자를 격리수용한 익산병원, 부산 용호병원, 안동 성좌원, 칠곡병원 등도 사정은 같았다.
한센병은 격리가 필요한 질환이 아니며,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는다. 이미 광복 전후부터 '한센병은 치료가 가능하며 유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국가는 침묵했다. 대신 한센병을 3군 법정 전염병으로 분류하여 환자들을 철저하게 고립 시키고 단종정책을 유지했다. 이같은 악습은 2006년에야 격리수용 환자의 범위에서 한센병이 제외됨으로써 사라졌다.
2007년 한센인들의 인권침해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된다. 위원회 조사 결과, 1970년대까지 6462명의 한센인과 그 자녀들이 폭행과 단종, 낙태수술 등의 반인권적 피해를 당한 사실이 밝혀졌다. 심지어는 1980년대 후반까지 낙태수술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1992년까지 공식적으로 정관절제수술이 이루어진 사실이 확인됐다.
정씨와 박씨처럼 단종정책에 희생당한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사람답게 살 권리를 침해한 국가를 고발한다! 1950년부터 1978년까지 정관절제·임신중절수술을 당한 이들은 2013년 국가를 법정에 세웠다.
국가는 "정관절제수술이나 임신중절 수술이 당사자 동의에 따른 것"이라고 우겼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동의에 의한 수술이었일까. 1954년 제정된 전염병예방법은 한센병 환자를 비교적 전염력이 낮은 제3종 전염병으로 분류했다. 그러면서도 1, 2종 전염병과 동일하게 강제격리하게 했다. 이 때문에 한센인 스스로도 전염성과 유전을 걱정할 정도였다. 이러한 격리수용 정책은 일반인들에겐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고, 한센인들에겐 열등감과 외부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국가는 단종수술 장려, 출산 억제를 지시했고 소록도병원은 충실히 따랐다. 병원 내 출산은 금지되었다. 한센인이 출산을 원할 경우 병원을 나가야 했고, 아이를 낳더라도 병원은 즉시 부모로부터 떼어놓았다. 병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산을 강행할 한센인은 없었다.
바깥생활은 또다른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차별과 편견 탓에 일반인들과 어울려 살 수 없었다. 지역 주민들이 정착을 방해하는 일도 예사였다. 한센인은 완치된 뒤에도 외모에 변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표출하거나 반감을 갖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센인들은 눈물을 머금고 수술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법원은 인간 본연의 욕구인 부부동거를 조건으로 수술을 받도록 한 행위는 "강요된 행위 또는 반사회적인 조건이 붙은 동의"라고 꼬집었다.
법원 "정관절제·임신중절 강요는 국가 의무 저버린 행위" 국가의 변명은 더 있었다. "당시 소록도병원 환자수용 여건과 예산상 한계 및 가족계획 시책에 따라 병원 내에서 출산을 억제하는 것은 부득이한 정책이었다." 과연 그럴까. 어떤 이유로도 출산금지는 헌법에 위반하는 행위이며 반인권적인 처사이다. 그런데도 국가는 그들의 동거와 출산을 통제하는 정책을 폈다. 국민에게는 누구나 보호받아야 할 가치와 권리가 있다.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국가의 보호에서 제외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런데 국가는 그들에게 어떻게 했나. 법원의 판결을 요약하면 이렇다.
국가가 정관절제, 임신중절수술을 시행한 것은 정당한 법률근거 없이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와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자유,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했다. 나아가 국가가 개인의 존엄을 기초로 한 혼인과 가족생활을 보장할 의무와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할 의무, 보건에 관하여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리는 것으로 위법하다. 젊은 날 고통의 대가로 이들은 위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정씨처럼 정관수술을 받은 남성은 3천만 원, 박씨처럼 임신중절수술을 받은 여성은 4천만 원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고 상소로 맞섰다. 사건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정부의 입장은 일제강점기 소록도병원에 한센인 격리정책을 도입한 일본의 태도와 비교해도 실망스러웠다. 일본의 경우 2001년 5월 구마오코 지방재판소가 한센인 강제격리 정책의 근거가 되었던 나예방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 정부는 잘못을 인정, 항소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여 일괄 보상을 실시하였다. 일제강점기 소록도의 한센인들도 500여 명이 보상을 받았다.
한센병은 결핵보다 전염성이 낮고 완치가 가능하다. 유전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기피 대상으로 여기는 건 국가의 잘못이 크다. 차별과 편견을 방치하고 더 나아가 강제낙태나 정관수술을 강요한 잘못은 돈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판결②] 삼청교육대 저항 민주화운동 인정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