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 축성 모형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풍납토성 축성 모형. 풍납토성은 판축기법(돌을 판판하게 깔고 위에 흙을 다지는 것)을 사용하여 고운 모래로 한 층씩 다져 쌓았은 평지토성이다.
전상봉
1925년 7월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태풍은 기록적인 대홍수를 동반했다. 7월 16일부터 사흘간 지속된 집중호우로 서울 이촌동을 비롯한 뚝섬, 잠실, 신천, 풍납동 일대가 물바다가 됐다. 을축년대홍수로 기록된 이때의 물난리로 400여 명이 사망하고, 1만2천 호의 가옥이 유실됐다.
기록적인 피해를 동반했지만 을축년대홍수는 뜻밖의 선물을 남겨놓았다. 서울 암사동의 선사유적지와 한성백제의 왕성이 있었던 풍납토성을 역사의 깊은 잠에서 깨운 것이다. 한강의 범람으로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석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풍납토성에서는 청동초두, 금귀걸이, 유리옥 등 백제의 유물이 발견됐다. 그러나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터로 평가받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백제의 첫도읍지인 하남위례성 위치는 학계의 오래된 논쟁거리였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했는데, 사천(蛇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직산(稷山)이다"라는 기록에 근거해 충남 천안시 직산면이 지목되기도 했고,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었다. 1937년에는 일본 학자 야유카이 후사노신이 '풍납토성은 하남위례성'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사적 11호로 지정(1963년 1월)된 다음 해인 1964년 김원룡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발굴팀이 풍납토성을 처음 발굴조사한다. 이때의 발굴조사로 풍납토성은 백제초기 유적으로 확증됐다. 그 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몽촌토성 일대에 올림픽공원이 조성되는 상황 속에서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도 했다.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터로 인정 받게 된 계기는 우연한 사건에서 시작됐다. 1997년 1월 4일 선문대 학술조사단을 이끌고 풍납토성을 찾은 이형구 교수가 터파기 작업이 한창이던 아파트공사장에 잠입, 수많은 백제 토기 파편이 박혀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이형구 교수는 이 같은 사실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에 제보했고 즉각적인 현장검증과 긴급구제발굴이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1500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던 한성백제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7년 긴급구제발굴을 시작으로 풍납토성 일대에 대한 발굴은 여러 차례에 진행됐다. 성벽 절개 발굴을 비롯, 왕성터로 추정되는 경당지구와 미래마을에 대한 발굴을 통해 수많은 유물들이 수습됐다. 이를 토대로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터였다는 것이 입증됐다.
또 풍납토성 발굴로 한성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으로 구성된 이성(二城)체계였다는 사실이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이로써 서울의 정도(定都) 역사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때부터 600년이 아닌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한 때로부터 2000년으로 그 시기가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잊혀진 왕도, 풍납토성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에 도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9대 왕인 책계왕대에 이르면 위례성과 같은 의미로 도성을 지칭하는 한성이 등장한다. 비류왕 24년(327)에는 북한성(北漢城)이라는 명칭이 쓰이고, 392년 아신왕 원년에 다시 한성이 등장한다. 그후 전지왕대와 한성백제의 마지막왕인 개로왕대에 이르기까지 한성이란 명칭이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이런 연유로 2012년 4월 서울 올림픽공원 안에 신축 개관한 박물관의 명칭은 한성백제박물관으로 명명됐다.
학계에서는 한성을 왕성인 풍납토성과 방어용인 몽촌토성을 묶어 구성된 이성체제로 추정한다. 외적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백제는 위례성을 확대해 북성과 남성의 이성체계로 정비하고 이를 한성이라 했다는 주장이다. 즉, 북성인 풍납토성은 왕성으로 평상시 왕이 생활하며 외적이 침입할 경우 남성인 몽촌토성으로 이동해 전투를 치르는 이성체계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