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공간을 자랑하는 조선 왕릉의 풍경. 사진은 선조의 무덤인 목릉. 목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동구릉 경내에 있다.
김종성
이렇게 임금이란 자리는 최고 권력자와 최고 부자가 되는 길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쟁탈하기 위한 투쟁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핏줄에서 태어난 형제간일이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금 자리를 위한 투쟁에서는 '형제 따로, 남 따로'가 있을 수 없었다. '우리 형제들은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라고 자신만만해 할지라도, 막상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우리 자신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임금 자리 앞에서는 형제와 남남이 따로 없다는 점은, 당나라의 압박을 받고 중동으로 쫓겨 간 뒤 중동·북아프리카·동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세운 투르크족(돌궐족)의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투르크족이 세운 세계적 강국이자 '중동의 중국'이었던 오스만투르크(1299~1922년)에는 냉혹한 권력의 속성을 반영하는 살벌한 제도가 있었다.
이 제국에는 장자 상속제가 없었다. 누구든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는 왕자가 차기 술탄(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그 외의 나머지 왕자는 모두 다 저승으로 직행했다. 새로운 술탄을 보호할 목적으로 술탄의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는 관행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17세기부터는 이런 관행에 변화가 생겼다. 술탄이 못 된 왕자들을 죽이지 않는 대신, 외지고 밀폐된 공간인 카페스에 가둬두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카페스는 새장을 뜻했다. 이런 공간에 왕자들이 연금 혹은 유배됐던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방식은 술탄의 권력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이 점은 술탄의 폐위를 목표로 한 정변 17건 중에서 14건이 17세기 이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술탄이 되지 못한 왕자들을 살려뒀더니, 그들이 중심이 된 반란이 빈발했던 것이다.
이것은 술탄이 된 형제를 자랑스러워하며 응원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그 자리를 빼앗아 보려고 하는 오스만투르크 왕자들의 심리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세종처럼 형제의 안녕과 정치의 안녕을 동시에 달성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이로부터 알 수 있다.
선조가 조금 더 살았다면... 광해군의 운명은?이런 냉혹한 현실은 형제들을 죽음으로 내몬 광해군의 패륜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광해군이 동복형인 임해군은 물론이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분명히 비정하고 나쁜 일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의 처지를 살펴보면, 그에게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서얼 출신인 광해군은 아버지인 선조를 대신해서 7년간의 임진왜란을 총지휘하고 나라를 구하는 데 기여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 선조는 '지난 7년간 네가 한 일을 나는 모른다'는 식으로 광해군을 냉대했다. 그러다가 전쟁 후에 재혼한 인목대비(당시는 왕후)한테서 적장자 영창대군이 출생하자, 광해군을 몰아낼 듯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조가 영창대군이 세 살일 때 죽지 않고 좀더 오래 살았다면, 영창대군이 새로운 세자가 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전직 세자로서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광해군이 어떻게 됐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쥐 죽은 듯이 살아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왕이 못 된 왕자'가 이미 7년간이나 국제적으로 능력을 과시했으니, 광해군이 왕이 된 이복동생 밑에서 목숨을 지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만약 영창대군이 왕이 됐다면, 영창대군 정권은 광해군을 '새장'에 가두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17세기 이전의 오스만투르크 관행에 입각해서 광해군을 처리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상황들을 감안하면,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관계를 단순한 형제관계로만 볼 수 없다는 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비극, 정치현실이 낳은 불행한 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