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공원서소문 공원에 있는 순교자현양비.
곽동운
조선시대 한양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무슨 문? 시체가 나가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하나는 소의문이라고 불렸던 서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남소문 역할을 했던 광희문이다. 조선시대 한성부에서는 도성 안과 도성 인근 십리 안에는 묘를 쓰는 것을 금지했다. 도성 인근 십리 부근을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했는데, 도성과 성저십리는 한성부의 관할이었다. 만약 도성 안에도 묘를 썼다면, 아마도 남산 같은 경우는 공동묘지가 됐을지 모른다. 그럼 '남산골 샌님'이 아닌 '남산골 처녀귀신'이 같은 괴담이 퍼져 나갔을까?
처형장으로 쓰인, 서소문 서울 시청역에서 <중앙일보> 사옥 방면으로 가다보면 철도건널목이 보인다. 그 건널목을 건너면 공원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서소문 공원이다. 서소문 공원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근린공원 규모의 작은 공원이지만 그 역사성만큼은 대단한 곳이다.
서소문은 소덕문(昭德門) 혹은 소의문(昭義門)으로 불린 사소문 중 하나다. 1396년 태조 3년, 이 문이 지어졌을 때는 소덕문이라 불렸다가 1744년(영조 20)에 문루를 세우면서 소의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자리에서 좀 벗어난 곳에 서소문 공원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소문은 광희문과 함께 시체가 나가는 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광희문과는 다른 것이 있었다. 처형장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서소문, 정확히는 서소문 밖이 처형장으로 쓰였는데 이는 유교 오경 중 <예기>에 언급된 가르침을 적용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예기>에는 '형장은 사직단의 우측이어야 한다'고 적어 놓았는데 서소문 밖이 그 말에 일치되어 조선의 공식 처형장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