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 공익광고임시완이 출연한 고용노동부 노동시장 개혁 공익광고
고용노동부 CF 캡처
연예인은 정치인, 공무원과 같은 공인이 아니다. 대중의 인기가 자산인 연예인에게 공익광고는 하나의 기회로 작용한다. 그 기회를 잡았다는 것에 대해 (설령 그 기회가 그에게 인기를 깎아먹을 위기였다고 해도) 어느 누구도 그 행위 자체를 욕할 수는 없다.
즉 핵심은 '광고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을 수 있으니 비난하지 말자'가 아니라 '연예인으로서 인기를 더 얻기 위해 공익광고에 출연한 행위를 비난할 수는 없다'에 있다. 광고로 인해 제 살 깎아먹기 식으로 이미지상의 타격을 입은 건 임시완과 그의 소속사다. 누구보다 아쉬울 그들에게 실망할 수는 있어도 다짜고짜 비난하는 건 가혹하다.
두 번째 경우는 임시완과 그의 소속사가 장그래법의 의미를 알고도 그 광고에 출연했을 때의 경우다. 앞의 조건보다 보다 복잡 미묘한 상황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필자 역시 '장그래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지고 싶지만, 냉정히 말해 이 경우에도 임시완과 그의 소속사를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로서는 선택을 한 셈이다. 어느 정도 파장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광고를 찍음으로서 얻는 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물론 결과적으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비정규직을 분한 연기자가 비정규직을 위한 콘텐츠, 광고에만 한정해서 출연할 수는 없다. 이미지대로만 출연하라는 말은 극단적으로는 생계를 포기해버리라는 의미가 될 수 있고, 일반적으로는 연기의 폭을 좁히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은 말이 될 수 있다. 임시완과 소속사가 장그래법을 알면서도 광고에 출연했다면 우리는 그 행위에 대해 충분히 비판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무작정 매도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다. 돌이켜보면 '임시완=장그래'라는 프레임 안에서 장그래에게 아쉬운 것 아닌가. 임시완과 장그래의 등식 관계가 깨지는 순간, 해당 광고의 논란은 희미해질 것이라 확신한다(황정민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보이지 않듯이 말이다).
차라리 광고에 출연한 연예인보다는 해당 광고를 기획한 이에게 더 아쉽다. 광고 기획자라면 장그래법의 취지가 무엇인지 알았을 텐데 광고 대부분을 드라마 <미생>의 장면들로 채웠다. 끝내 대기업의 비정규직 타이틀을 떼지 못해 좌절한 장그래와 장그래법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한쌍이다(둘의 공통점은 '장그래'라는 이름밖엔 없다).
어울리지 않는 한쌍을 묶어버리니 광고의 메시지에 공감하기도 어렵다. 장그래와 장그래법의 결합으로 사람들에게 메시지가 널리 알려지긴 했으나 메시지의 부조화로 부정적인 인식만 높이고 말았다. 광고에 영상을 제공한 tvN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해당 광고는 <미생>의 원작자를 넘어 지난해 <미생>을 사랑했던 시청자들을 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