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학생과 같은 군사훈련복을 입고 단체 활동에 나온 여학생들(시안 대당부용원)
김소연
"아내 직장이 집에서 더 멀고 더 바쁘니까요."오래 전 미국에서 만났던 L도 그랬다. 공부는 아내인 L만 하고, 남편은 집에서 살림을 했다. 그때 한국 유학생 부부는 아내가 내조를 하고, 간혹 같이 공부를 하더라도 시댁 눈치가 보인다거나, 아이 양육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나는 L에게 "시댁에서 뭐라고 안 해? 기준이 뭐야?" 물어보았다. 그 때 L의 대답도 간단했다.
"시댁이 왜? 기준? 그야 내가 공부를 더 잘하니까." 중국에 온 한국 여성들은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부러워한다. 그런데 중국 여성이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장이머우의 영화 <붉은 수수밭>과 <홍등>을 보더라도, 과거 중국 여성의 지위는 그야말로 낮고 낮았다. 역사 속에서 측천무후(則天武后)와 서태후(西太后) 같은 특별한 여성을 제외하면 일반 여성은 사고 팔리는 소유물이었고 축첩 제도와 전족의 희생양이었다.
하지만 신중국 탄생 후 중국 여성은 "세상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는(半邊天)" 존재가 되었다. 거기에는 신중국 초기의 신혼인법과 토지개혁법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신혼인법은 봉건적인 혼인 제도와 가부장제를 개혁했고, 토지 개혁법은 여성의 토지 소유권과 경제 활동을 보장했다.
신혼인법으로 일부일처제가 되고 중혼과 축첩 및 과부 재혼에 대한 간섭이 금지됐다. 무엇보다 부부가 재산권을 평등하게 나누게 되었고, 혼인법을 위반한 상대에겐 형사 책임을 지웠다. 물론 초반에는 혈연 공동체로 이뤄진 사회에서 법보다 관습이 여전히 앞섰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전국적인 선전 교육과 부녀 연합회 중심의 대중 운동으로 신혼인법은 점차 법 제도로 정착하게 됐다.
토지 개혁법은 여성에게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토지를 분배하고 소유권을 인정했다. 뒤이은 농업 집단화 정책으로 토지 경작과 운영이 가족 단위가 아닌 집단으로 바뀌면서 가장의 힘은 더욱 약해졌다. 대신 여성은 집단의 일원이 되어 생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집단 생활 조직과 생활 복지 사업을 이끌었던 인민 공사는 공공 식당, 보육원, 양로원 등을 만들어 가사노동을 사회화했다. 당시 대부분 문맹이었던 여성이 교육을 받으면서 여성 간부가 나오고 각 계급의 지도부에 배치됐다. 일자리와 임금에서도 남녀 차별이 없어지고 가정에서는 가사 분담이 이뤄졌다(박광준, 오영란 <중국계획출산정책의 형성과정> 참고).
그렇게 과거 집 안에 갇혀 지냈던 여성이 집 밖으로 나와 사회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사회주의 혁명의 건설자이고 노동자로 인식되었다. 당연히 여성의 지위는 향상되었고, 여성은 사회의 보조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절반을 떠받치는 주력군이 되었다.
남녀 평등한 중국? 속사정은 다르다그런데 중국의 여성 해방 과정은 서구 페미니즘과 달리 남성 혁명가들이 중심이 되어 제기된 혁명 운동의 일부였다. 계급성, 당성, 인민성이 절대적인 가치를 발휘했던 마오쩌둥 시대에 남녀 성별의 차이나 여성성은 존중받지 못했다. 여성의 본보기는 1972년 판쟈쥔(潘嘉峻)의 유화 '나는 바다 제비(我是海燕)'와 같았다. 폭풍우 속에서 전신주에 올라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만큼, 그야말로 직업, 생활, 체력, 성격 모두 남성화된 이미지였다(양둥핑, <중국의 두 얼굴> 참고).
그 과정을 거쳐 중국 여성의 지위는 한국이나 일본 여성보다 높아졌다. 부부가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을 분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 경제 활동을 하는 성인 여성의 비율, 경제계 및 정계 고위직에 진출한 여성의 숫자 모두 한국과 일본을 앞지른다.
하지만 현실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지 양성 평등까지는 아니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남성 중심의 전통이 공산당 집권 60여 년 만에 소멸되기는 힘들다. 아무리 법률을 만들고 정책을 밀어붙여도, 일상 생활 구석 구석까지 바꾸기에 60년은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위로부터의 개혁 속도와 아래에서 더디게 흐르는 의식의 변화 속도는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