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티탄(NGUYEN THI THANH) ‘퐁니퐁넛학살’ 생존자 : 베트남전 당시인 1968년 8세였던 탄은 학살로 어머니, 언니, 남동생, 이모, 사촌 동생 등 가족 다섯을 잃었다. 학살이 일어난 날 배에 총상을 크게 입어 창자가 튀어나온 부상을 입고 엄마를 찾아다닌 기억을 갖고 있다. 함께 살아남은 오빠는 당시 한쪽 엉덩이가 날아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평화박물관
본명이 응우옌 떤 런인 런 아저씨는 1966년 2월 중순 베트남 중부 빈딘성 따이빈사에서 벌어진 학살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잃었다. 맹호부대가 지나간 인근 15개 마을에서 3일에 걸쳐 1004명의 민간인이 죽임을 당했다.
12년 전 내가 처음 베트남을 갔을 때 만난 분이지만, 그가 흑흑 흐느끼는 우리 일행들 앞에서 애써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담담하게 그날의 끔찍했던 일을 말해주던 장면은 내 가슴 속에 너무도 선명히 새겨져 있다. 런 아저씨의 아버지와 형은 해방전쟁에 참여했다가 전사한 뒤였다.
새벽녘에 따이한 병사들은 15살이던 런 아저씨와 어머니와 누이동생 등 세 식구를 포함하여 마을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 누군가가 던진 물체가 런 아저씨의 발에 맞고 굴러가더니 꽝 터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 안이었다. 옆에는 각각 두 다리를 모두 잃은 누이와 어머니가 누워있었다. 동생이 먼저 숨을 거두었고, 네 동생이 죽었나보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이 동생을 둘둘 거적으로 말아 갔다고 한다.
어머니와 단 둘이 누워있는 방 안, 큰 소리로 울부짖던 어머니의 비명이 점점 가는 신음소리로 변하더니 그마저 끊어져버렸다. 동생을 묻고 온 마을 사람들이 다시 어머니를 거적에 말아 내갔다. 홀로 남은 데다 온 몸에 수류탄 파편이 박혀 몸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중상을 입은 그를 또 부모와 자식과 형제를 잃은 마을 사람들은 친자식처럼 돌봐주었다.
한 1년쯤 지나 몸을 가눌 수 있게 된 런 아저씨는 정글로 가 총을 들었다고 한다(런 아저씨의 이야기는 오마이뉴스에 평화의료연대 송필경 전 대표가 자세히 기고한 바 있다.
"한국군이 우리 마을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2013년 9월 8일).
15살이던 런 아저씨는 이렇게 한 번씩 한국의 평화기행단을 만나 옛 일을 들려주면 몇 날 며칠을 잠도 못 자고 힘들어 하실 터이지만, 그래도 우리를 만났을 때는 담담하고 의연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탄 아주머니는 한국사람 특히 성인 남성 얼굴을 대면하는 것조차 힘들어 하신다. 탄 아주머니는 사건이 터질 때 8살이었다.
2000년 베트남전진실위원회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활동을 할 때 우리는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퐁니퐁넛 마을에서 청룡부대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 보고서에는 뜻밖에도 학살 직후 현장에 당도한 미군이 찍은 사진들이 첨부되어 있었다.
여덟 살 어린 탄은 동생도 잃고 언니도 잃고 자꾸 쏟아져 나오는 창자를 부여잡고 어머니를 찾아 헤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탄 아주머니는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의 모습을 이 사진 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탄 아주머니의 배에는 아직도 긴 흉터가 남아있다.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흉터는 배에 남은 상처만이 아닐 것이다(탄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1999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던 <한겨레> 고경태 기자가 최근 펴낸 <1968년 2월 12일>에 자세히 나와 있다).
'증오비'와 '참전 기념비', 같은 전쟁 서로 다른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