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회 회원(2011. 5. 횡성 자작나무숲 미술관에서 오른쪽부터 노진덕, 구본우, 현동훈, 필자)
박도
추억의 거리를 걷다그때 노 제독으로부터 청우회 친구들이 다 모였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그와 헤어진 뒤 교보 앞에서 청우회 친구들을 만났다.
한 친구(현동훈)가 말했다. 그는 제주 출신으로 아직도 현역 CEO다.
"아직 저녁시간이 이르니까 우리 박 작가와 구본우 목사의 배달구역이었던 사직동 쪽으로 산책이나 갈까?"모두 좋다고 하여, 우리 네 사람은 거기서 광화문 네 거리를 지나 내수동 쪽으로 갔다. 나는 가는 길목에 도렴동에 있었던 옛 조선일보 세종로 보급소 자리가 떠올랐다. 자세히 살펴보니 지금은 일식집으로 변해 있었지만 골목은 그대로였다. 나는 1961년 가을, 고교 휴학생으로 조선일보 계동배달원이었다. 그 보급소에서는 영자신문 코리안리퍼블릭(이후 코리아헤럴드로 개제)을 취급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 영자신문은 접지가 되지 않고 본사에서 전지로 보급소로 보냈다. 그래서 배달원들은 이른 새벽 길바닥에서 그 전지를 일일이 접지를 하는데 바람이 불면 신문이 날려가 매우 애를 먹었다.
그 뒤 나는 동아일보 누하동을 배달했는데 보급소에서 신문을 받아 옆구리에 끼고 바로 그 길을 따라 체부동을 거쳐 누하동으로 갔다.
네 사람이 그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사직동으로 가는데, 특히 그 일대는 '경희궁의 아침' '파크 팰리스' 등 고급 아파트촌으로 옛 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종교교회와 천주교 세종로성당, 사직공원만은 옛 이름과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관절통 없이 등산을 거뜬히 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시절 아침저녁으로 신문배달을 했던 덕분일 거야."노 제독의 말이었다. 그의 말에 친구들은 모두 자기들도 그렇다고 긍정했다. 사실 나도 그랬다. 게다가 나는 보병장교 출신이니까 보병학교 시절 '3보 이상 구보'로, 그런 훈련 덕분인지 이후 걷거나 달리는 데는 이력이 났다. 그래서 젊은 날은 하루 종일 걸어도 다리 아픈 줄 모르고 살았다. 늘그막 항일유적답사 때도 안내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 나이에도 어쩌면 그렇게도 산을 잘 타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