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남
정운현
여정남(呂正男).
살아 있다면 올해 71세.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는 이름처럼 '바르게 살다간 남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해방 1년 전인 1944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경북지역의 명문 경북중·고를 졸업한 후 1962년 경북대 정외과에 진학했습니다. 중류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집안형편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고교 시절부터 여름방학을 이용해 막노동판을 찾았습니다. 돈벌이보다는 어려운 이웃들의 사정을 몸으로 느껴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가 세상과 처음 맞닥뜨린 것은 고교 2학년 시절인 1960년이었습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해 일어난 '마산 3·15의거'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구 2·28 학생의거'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그는 집에다가는 '산에 토끼 잡으러 간다'고 말하고는 대구고, 대구상고 학생들과 함께 학생시위에 참가해 이승만 독재정권 타도에 나섰습니다. 불의한 시대가 모범학생을 투쟁가로 이끈 셈입니다.
대학 3학년 때인 1964년,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인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하자 당시 대학가에서는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이어졌습니다. 그는 경북대에서 이 투쟁을 선두에서 주도하였는데 이 일로 세 차례 제적과 복학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이듬해 6월 군에 입대했습니다. 1969년 복학한 그는 경북대 비공개 서클인 '정진회(正進會)' 가입을 시작으로 학생운동을 재개했습니다.
당시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전태일 추도식 투쟁, 등록금인상 반대 투쟁, 교련반대 투쟁 등을 주도하던 그는 1971년 4월 경북대에서 전국대학생 서클대항 학술토론회 개최를 계기로 학생운동의 전국화를 추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날 토론회에서 발표된 '반독재 구국선언문'에서 월남전 파병을 '용병'이라고 표현한 것이 화근이 돼 이른바 '정진회 필화사건'으로 구속됐는데, 이것이 그로서는 첫 감옥살이였습니다.
1972년은 박정희 정권, 아니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해 10월 17일 박정희는 초헌법적인 '유신헌법' 공포와 계엄령 선포를 통해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야당과 재야, 대학가에서 유신헌법 반대투쟁이 이어졌으나 계엄령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많았습니다. 1973년 12월, 서울로 올라간 그는 이철, 유인태 등을 만나 전국 대학들의 반독재 연대투쟁을 논의하였습니다.
1973년 11월 3일, 경북대의 유신반대 투쟁은 2000여 명이 참가해 공안당국을 긴장시켰는데 그는 이날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이듬해 1월 8일 박정희 정권은 유신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하자 그는 다시 서울대, 경북대, 전남대와 연계투쟁을 벌이기도 계획하였습니다.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명의의 유인물 배포와 함께 서울시내 각 대학서 반유신 시위가 전개됐는데 이것이 바로 소위 '민청학련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