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호 의원실에서 제공한 1994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검찰 수사 주역들(촬영일은 1987년 3월 1일)' 사진. 왼쪽에 위치한 인물이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며 가운데는 안상수 현 창원시장이다.
동아일보
검찰은 박종철 열사가 사망한 지 엿새 만인 1월 20일에서야 사건을 치안본부로부터 송치받았다. 전날(1월 19일) 수사팀에 참여하고 있던 이승구 검사가 박상옥 검사로 교체됐다. 이렇게 수사 검사를 교체한 '이유'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승구 검사는 2차 수사 때 다시 수사팀에 합류했다.
1차 수사는 1월 20일부터 23일까지 3박 4일 동안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이었다는 사실에 비하면 굉장히 짧은 기간이었다. 안상수 검사와 박상옥 검사는 각각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를 맡았다. 박상옥 검사는 강진규 경사 외에도 나중에 물고문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났던 황정웅 경위와 반금곤 경정을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했다. 그런데 피의자와 참고인 모두 검찰로 부르지 않고 검사들이 각각 영등포교도소와 남영동 대공분실로 출장 가서 조사해 '밀실수사' 논란이 일기도 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오픈 아카이브스'에 공개됐던 1차 수사기록(701쪽)에 따르면, 박상옥 검사는 강진규 경사를 1월 20일과 23일 두 차례 신문했다. 강 경사 피의자 신문은 주로 박종철 열사를 연행한 과정, 물고문한 경위, 사망한 뒤 처리 과정 등에 집중됐다. 4반 소속인 강 경사가 1반 반장인 조한경 경위와 함께 수사한 이유를 캐묻거나(1차 신문) 당시에도 의혹이 일었던 전기고문 여부를 처음으로 추궁한 것(2차 신문) 정도만 눈에 띌 뿐이다.
하지만 박 검사는 중요하게 추궁할 내용들을 놓치고 있었다. 먼저 과연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2명만으로 박종철 열사 물고문이 가능했는지 여부다. 이는 '추가 고문 경찰관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캐물었어야 할 부분이다.
최환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조차 치안본부에서 수사결과를 발표한 직후 안상수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건강한 청년을 어떻게 2명이 고문하나, 2명일 수 없다, 더 조사하라"라고 지시했다. 또한 당시 물고문은 일반적으로 4, 5명(급한 경우는 3명)이 한 조가 되어 이루어졌다(2차 수사 때 황정웅 경위 진술). 하지만 박상옥 검사는 이러한 상식적인 의문("어떻게 2명이 고문하나?")과 사실("4, 5명이 한조가 되어 고문")을 수사에 적용하지 않았다.
또한 박상옥 검사는 '책상을 꽝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경찰 보고서(연행 피의자 변사사건 발생보고서)에도 충분한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이는 박종철 열사의 사망 원인이 어처구니없이 조작·은폐되고, 그 과정에 윗선의 어디까지 개입했는지 등과 관련된 부분이다. 김용갑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의 증언에 따르면, 청와대 수석들도 이 보고서를 두고 "초등학생도 못 믿는다"라고 평가했다.
"강○○ 정무제2수석이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군이 탁치니까 억하고 죽었다'고 보고하길래, 제가 '어이 강 수석,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라고 나무랐죠. 김○○ 정무제1수석과 박영수 비서실장 등 모두 못믿겠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경찰의 보고는 초등학교 학생도 못믿는다'고 했죠. 강 수석도 '나도 못 믿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경찰에서 그렇게 우기는데'라며 답답해했습니다."(월간 <신동아> 2007넌 6월호 김용갑 의원 인터뷰 중에서)"초등학생도 못 믿는다"라고 평가받은 경찰 보고서에 의문을 가졌더라면 박상옥 검사는 이 보고서가 작성된 주체와 경위, 윗선 보고과정 등을 추궁했어야 한다. 하지만 박 검사는 강 경사에게 직속 상급자를 확인하거나(1차 신문) "계장이나 과장, 부장 등 상급자는 박종철이 사망한 정확한 이유를 알고 있었나"라고 묻는 데(2차 신문) 그쳤다. 조작·은폐 보고서를 작성한 홍승상 계장(5과 1계)의 경우 참고인 조사조차 벌이지 않았다.
조한경-강진규도 없이 진행한 '얼굴없는 현장검증'그밖에도 박상옥 검사는 1차 수사 전에 이미 물고문 경찰관으로 지목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반'이 다르다는 점도 지나쳤다. 조 경위는 '대공 3부 5과 2계 1반' 반장이고, 강 경사는 '대공 3부 5과 2계 4반' 소속이었다. 반이 다른 경찰관 2명이 한 조가 되어 물고문을 진행한다는 것도 당시 대공수사 관행과 맞지 않았는데도 이를 제대로 추궁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사계획서상 박종철 열사를 연행하고 조사하는 경찰관은 반금곤 경정으로 적시되어 있었다. 당연히 반 경정이 물고문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다. 박상옥 검사가 이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언이 나중에 나왔다. 강진규 경사가 항소심 재판에서 "(박 검사가) '반금곤이 주범인데 왜 강진규가 주범자로 되어 있느냐?'고 추궁했다"고 진술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 검사가 추가 고문 경찰관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1차 수사기록에는 박 검사가 이렇게 추궁한 사실이 기록돼 있지 않았다. 박 검사의 '의도적 누락'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특히 1차 수사 이후 물고문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난 황정웅 경위와 반금곤 경정, 2차 수사 때 범인도피죄로 구속된 유정방 5과장과 박원택 5과 2계장을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한 시기도 부실수사 논란을 자초하는 부분이다. 이들은 모두 수사 마지막 날인 1월 23일 현장검증이 끝난 직후인 오후 7시 이후에 대공분실에서 조사받았다.
게다가 이들을 조사하기 전에 실시한 현장검증도 부실했다. 현장검증은 피의자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수사기관이 범행이 벌어진 현장에 직접 가서 묻고 피의자가 답하며 범행 과정을 재연하는 수사기법인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현장검증에서는 피의자들(조한경 경위, 강진규 경사)을 부르지 않았다.
상황을 부분적으로만 재현하는 '실황조사'를 벌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대목이다. 당시 국민과 언론은 "얼굴없는 현장검증"이라고 반발했고, 노승환 등 야당 의원 20명은 '현장검증을 공개리에 다시 실시하라'는 촉구서를 제출했다.
정구영 서울지검장은 1월 24일 오전 10시 1차 수사결과를 발표했고, 수사팀장인 신창언 형사2부장 명의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만을 기소했다. 이날 수사결과 발표장에는 서익원 차장과 신창언 부장, 안상수·박상옥 검사가 배석했다.
김학규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검찰의 1차 수사는 단순한 부실수사 차원을 넘어 경찰의 발표내용을 그대로 추인하는 '추인수사'였다"라며 "검찰의 직무유기는 이미 1차 수사 때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김학규 사무국장은 ▲ 2명이 한 조가 되어 물고문을 진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항소심 공판에서 반금곤 경정을 주범으로 특정해 추궁했다는 증언이 나오는데 이것이 1차 수사기록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 박종철의 하숙집 동료인 하종문의 참고인 조서가 지나치게 허술하게 작성됐다 ▲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가 물고문 횟수와 관련해 상반된 주장을 폈지만 그냥 넘어갔다는 등의 사실을 들어 "박 검사를 비롯한 수사검사들이 물고문에 가담한 경찰관이 2명 이상이라는 점을 알았음에도 이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이를 덮는 데 함께 했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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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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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문은 5명이 한 조... '상식' 묵살한 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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