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과 가난한 삶책 표지
청년의사
우리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노숙인을 무능하고 나태하며 무절제하고 폭력적이라고 여긴다. 노숙인에 대해 특별한 생각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조차도 그들을 자신과 같은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노숙인 쉼터가 건립될 때마다 부닥치는 지역주민의 반대 여론, 역사나 공원 등에서 노숙인을 몰아내려는 목소리를 종종 듣곤 하지만 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여기에 이러한 편견을 깨부수는 책이 있다. 노숙인 역시 우리 사회 공동체의 일원이며 노숙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프고 병든 부분을 돌아보는 것임을 일깨우는 책이다.
지난 십수 년간 '길 위의 의사'로 불리며 노숙인을 돌봐온 내과의사 최영아씨의 책 <질병과 가난한 삶>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떠올렸고 그 때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리아 수녀회 도티기념병원 내과과장이자 비정부기구 마더하우스의 대표로 재직 중인 저자는 2001년 내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이래 지난 14년 동안 의료보험이 없는 가난한 환자들을 돌봐왔다. 그동안 그녀가 거친 병원은 청량리 다일천사병원, 영등포 요셉의원, 서울역 다시서기의원, 마리아 수녀회 도티기념병원 등인데 하나같이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병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저자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향한 세상의 왜곡된 시선이 변화하길 바라면서 자신의 석사논문을 바탕으로 이 책을 꾸렸다고 말한다. 가난과 질병으로 인한 모든 고통이 노숙인 한 개인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의 왜곡된 인식이 노숙인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쳐왔으며 지금도 미치고 있기에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장이라 하겠다.
저자는 '노숙인(homeless)'에 대한 정의로 논의를 시작한다. 책에 따르면 노숙인은 가정과 일정한 주거가 없는 사람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열악한 환경에 내몰려 생활하는 이를 뜻한다. 저자는 14년 동안 노숙인 진료경험과 철저한 자료조사, 외국 사례와의 비교연구를 통해 한국의 노숙인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저자는 노숙인 문제가 우리사회의 가장 아프고 약한 부분이기에 질병으로부터 몸을 치유하듯 이 문제를 고침으로써 사회를 보다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국 사회의 노숙인은 약 22만 명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저자는 노숙인이 이같이 늘어나게 된 이유로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기준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황폐해진 인간성을 들고 있다. 기존의 인간적 가치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가정과 사회에서 실패를 맛본 이들이 자존감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회전문 현상이 노숙인 문제 해결을 막는다책에 따르면 한국 노숙인 대부분은 거리, 무보증 월세와 일세방, PC방, 사우나, 한시적인 자활근로와 병원생활까지 여러 주거형태를 전전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를 '회전문 현상'이라 정의하는데 오랜 관찰경험을 통해 노숙인 대부분이 이 같은 회전문의 한 지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진단한다.
노숙인은 열악한 주거환경, 어려운 경제여건, 질병 및 장애 속에서 만성적인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간다는 것이다. 책은 다양한 통계지표를 통해 노숙인이 회전문 현상을 겪으며 다양한 질병에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증명하고 이들이 노숙인 진료시설 및 치료시설을 전전하다 죽음을 맞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현재 한국에는 노숙인 종합지원센터, 일시보호시설, 자활·재활·요양시설, 급식시설, 진료시설, 쪽방 상담소, 그 밖의 노숙인 지원 서비스가 다양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들 단체 사이의 상호협력과 연결 시스템이 부재할 뿐 아니라 정부의 '생색내기'식 행정까지 더해져 노숙인 문제의 근본적 대안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노숙인의 지역사회 재정착을 위해서는 주택을 비롯해 다양한 물품과 서비스를 확보하고 이들 개개인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