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이 잘 튼 씨앗을 나무 젓가락으로 고르고 있다.면티에 불린 씨앗은 뿌리가 길어도 섬유조직 속으로 파고 들지 않아서 작업하기 좋았는데, 수건에 불린 씨앗은 뿌리가 수건과 하나가 되어 골라내기가 어려웠다. 수건으로는 씨앗을 불려서는 안되겠다.
박인성
지난해 농한기에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한가로움을 즐기다가 문득 햇빛과 온도 관리가 관건이 되는 모종 키우기가 아파트에서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베란다를 이용한 텃밭을 만드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느 농가에서도 아파트 거실에서 모종을 키운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텃밭이 된다면 모종을 키우는 하우스도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곧바로 고추 모종 키우기를 시도했다. 싹 트기에서 네 잎이 나는 시기까지는 잘 자라 주었다. 그러나 모종을 밭으로 옮겨 심을 때가 다 돼 가는데, 잘 자라던 고추 모의 줄기가 연약해지면서 무거운 잎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정상적으로 자란다면 30cm 정도까지 곧게 자라줘야 하는데 굽은 소나무처럼 휘어져 제대로 자라지를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응급 처방으로 이쑤시개를 지지대 삼아 줄기를 곧게 잡아보려 했지만 어림없었다. 결국, 제대로 된 예쁜 모종으로 키워내는 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휘어지고 쓰러져 처참한 모습이 된 고추 모종들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 농장의 비닐하우스 한 귀퉁이에 옮겨 심었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논일 때문에 정신없이 세월이 흘렀는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이 연약한 모종들이 땅심을 받아서 줄기를 곧추세우더니 주렁주렁 꽃이 피기 시작했다. 놀라운 생명력이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고추를 수확할 수 있었다.
지난해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고추 모종을 잘 키우시는 분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어린 모를 포트에 옮겨 심은 후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잘록병에 걸렸을 수도 있고, 너무 따뜻하고 평온한 곳에서 키워서 웃자란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비닐 하우스에서 키울 때도 날씨가 따뜻한 날에는 하우스를 개방해서 바람을 맞혀야 고추 모가 건강하게 자란다고 한다. 단순하지만 세심하게 온도와 햇볕, 물과 바람을 관리하지 않으면 성공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올해는 고추 모가 올라 오면 주간에는 거실문을 개방해 바람을 관리하고, 마르지 않을 정도로만 물 관리를 해 주기로 했다.
미지근한 물에 담가 고추씨를 불리는 과정을 생략하고 따뜻한 물에 적신 면티나 수건을 이용해서 고추씨를 직접 불려 봤다. 씨앗에 수분이 충분하게 전달되지 않았는지 일주일 이상을 불려야 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면티에 물을 줄 때는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거실 바닥으로 살짝 흘러 내릴 정도로 충분히 부어 주었다. 물에 담가 불릴 때보다 사나흘 정도 시간이 더 걸렸다. 시간 절약을 위해서는 기존 방법이 더 효율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해에는 위와 같이 불려서 촉이 튼 고추씨를 모판에 흩뿌려 가볍게 흙을 덮어 떡잎이 4개 나올 때까지 집단으로 키운 뒤에 다시 포트로 옮겨 심었다. 이때 어린 잎을 옮겨 심는 작업이 매우 힘들었다. 올해는 옮겨 심기 작업을 없애기로 했다. 면티에 불려 촉이 튼 고추 씨앗 중에서 튼튼한 것을 골라 포트에 직접 이식하기로 했다.
50개의 포트가 있는 모종판을 사서 원예용 상토를 채운 다음에 손으로 일일이 눌러 씨를 심을 준비를 했다. 두 개를 하고 났더니 어깨가 아팠다. 일단 모종판 전체에 흙을 부은 다음 또 다른 모종판으로 위에서 한꺼번에 눌러줬더니 한 번에 심을 준비가 끝난다.
흙이 담긴 포트 안에 젓가락으로 촉이 잘 나온 씨앗들을 한 개씩 옮겨 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주었다. 덮는 흙은 보통 씨앗 두께의 2~3배 정도면 되는데, 일을 빨리 끝내려는 욕심에 전체 모종판 위에 흙을 덮어 버렸더니 너무 깊게 씨앗이 묻혀 버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수건 사이에도 뿌리 내리는 씨앗들... 대단한 생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