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자주 아프다이비인후과를 3일에 한번씩 간다. 감기에 장염에 독감까지 약이 그칠 날이 없다.
김승한
아이들이 자주 아픕니다. 목감기와 콧물은 기본이고 장염에 독감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이며 약국을 내 집처럼 드나듭니다. 독감에 걸리니 학교에도 못 보내고 회사로 데리고 왔습니다. 낮에는 좀 괜찮다가도 밤이면 어김없이 기침에 고열이 시작됩니다.
9일 밤늦은 시각, 아이들의 열이 내리는지 이마를 만져보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저에게도 많이 아팠던 적이 있었거든요. 잠깐 옛날 얘기 좀 해보고자 합니다. 고3때의 이야기입니다.
힘들었던 나의 고3 시절무엇엔가 놀라 벌떡 일어나 눈을 떴습니다. 악몽인가 봅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이불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일단 이마와 목 주위에 맺혀있는 땀부터 닦았습니다. 가슴에 통증이 시작됩니다. 한 번 통증이 시작되면 약 5분간 죽는 것 같은 고통이 지속됩니다.
화장실에 다녀와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아내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눕기 전에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누웠습니다. 또 통증이 몰려옵니다. 가슴이 쓰리고 심장이 빠른 속도로 뜁니다. 한 시간 정도는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려야 잠들 수 있습니다.
폐결핵이었습니다. 약 25년 전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3월 첫 주에 전 폐결핵 진단을 받았습니다. 얼굴이 하얗고 핏기가 없으며 쉬이 지치고 미열과 함께 기침을 많이 합니다. 가끔 피를 토하기도 하고요.
당시 우리 집은 아파트 3층이었는데 1층에서 3층까지 올라가려면 두 번을 쉬었습니다. 2층에서 한 번 쉬고 3층에서 벨을 누르기 전에 한 번 더 쉬고요. 그러고 집에 들어가면 호흡이 가빠지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거기에 늑막염까지 함께 걸려 제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잠자리에 눕거나 일어날 때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은 아직도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웠던 순간만큼은 지금도 몸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증상 때문에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의사선생님이 병의 상태를 설명하려다 망설이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러더니 어렵게 말을 꺼내더군요.
"결핵입니다. 폐결핵이요. 지금은 거의 사라진 질병인데 요즘 들어서 10대를 중심으로 환자가 증가하는 추세에요. 결핵균이 폐에 많이 퍼진 상태라 학생이 많이 힘들 텐데……. 휴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휴학을 권하는 의사선생님, 그러나당시 전 키 163cm에 몸무게는 45kg 정도였습니다. 안 그래도 작은 키에 희멀건 피부를 하고 깡말라 흡사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아빠는 몸이 약해서 그런 거지 병은 아닐 거라 했지만, 아빠와 재혼한 새엄마는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을 감지하고 병원에 보낸 것입니다.
이후 저는 학교 가는 길이 마치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 마냥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45kg의 몸무게를 지탱하는 것도 힘든데 그것보다 참기 어려운 통증은 수업시간에 수시로 찾아오는 기침과 무호흡 증세였습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침을 참느라 배에 힘을 주고 입을 막는 것은 그래도 참을 만합니다. 멀쩡히 앉아 있는데 갑자기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30초에서 1분 가량 계속되는 이 현상이 때문에 극도의 공황상태에 빠진 저는 가슴을 쥐어뜯고 어떻게든 숨을 쉬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숨을 쉴 수 있었고요.
그 기억 때문인지 전 지금도 호흡곤란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군대에서 화생방 훈련 시엔 최악이었습니다. 지금도 물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고요.
아무리 힘들어도 휴학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아빠가 공무원이긴 했지만 당시 우리는 3남 2녀. 아버지 수입만으로 재수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어차피 성적도 뒤에서 놀고 있는 처지라 한 학년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휴학은 집어치우고 고3 수업에 야간자습까지 하고 집에 왔습니다.
그렇게 힘겹게 1년을 보내고 학력고사를 치렀습니다. 시험을 치르는 당일 새벽에 일어나 숟가락으로 국물을 뜨는데 손이 부르르 떨려 국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간신히 식사를 마치고 시험장으로 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