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텃밭한강대교 중간에 위치한 노들섬에 있는 노들텃밭. 텃밭 뒤로 한강대교 아치가 보인다.
곽동운
현재 서울시와 관련된 한강 다리는 몇 개일까? 총 26개다. 지난해 11월 구리암사대교의 임시 개통으로 26개로 늘어났다. 동쪽 강동대교에서부터 서쪽 신행주대교까지 한강변을 따라 늘어서 있는 다리들은 한강철교와 같은 열차 전용 교량도 있고, 방화대교처럼 자동차만 다닐 수 있는 다리도 있다. 물론 사람과 자동차가 동시에 이동할 수 있는 교량이 대다수다.
서울의 팽창과 함께 한강에도 차곡차곡 다리들이 놓이게 됐다. 한강 다리들은 '한강의 기적'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상징물이 된 것이다. 한강 다리 교각 아래로 우리의 근현대사가 흘러갔고, 또 흐르고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 셈이다. 역사성만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만의 색깔이 강한 다리들도 생겨나면서 한강 다리를 따라 도보 탐방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보행로의 확장과 연결로 정비 등으로 한강 다리 자체가 트레킹 코스로 자리 잡은 것이다.
현대사 비극 품은 한강대교한강에 처음으로 들어선 인공 교량은 한강철교다. 1900년도에 들어선 한강철교는 말 그대로 철도 전용 다리였기에 일반 사람이 이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지금이야 교통카드만 있으면 전철을 타고 느긋하게 한강을 넘어갈 수 있지만, 옛날 구한말의 백성이 기차표를 쉽게 끊을 수 있었겠는가?
일반 백성이 편리하게 한강을 넘을 수 있게 된 건 1917년부터였다. 한강 인도교라고 불렸던 한강대교가 개통됐기 때문이다. 한강철교 제작 때 남은 자제들로 건설되어서 그런지 개통 당시 한강대교는 대교(大橋)라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았다. 중앙 차로 부분이 4미터, 좌·우측 보도 부분이 각각 1미터, 총 6미터의 폭이었기 때문이다.
한강대교는 당시 경성 사람들의 나들이 장소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룻배에 의존해 도강해왔던 한강을 느긋하게 걸어서 건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무척 신기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한강대교는 그 긴 역사만큼 큰 아픔도 가지고 있다. 한국 전쟁 시기였던 1950년 6월 28일 다리가 폭파됐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서울 함락이 눈앞에 이르자 당시 이승만 정권은 한강대교 폭파라는 극단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