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라 오버"어느날 남편이 사 가지고 온 '무전기'. 바로 옆에서 '나와라 나와라' 하는 모습이 귀엽다. 생각보다 활용도가 무척 높다.
박보경
남편이 일찍 오는 날이면 우리 가족은 저녁산책을 나간다. 주변에 딱히 갈 만한 곳은 없다.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도는 게 대부분이다. 어느 날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이들은 그것을 '모험탐험대'라고 불렀다. "아빠 우리 모험탐험대 나가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었던지 모험탐험대의 횟수가 늘어나자 남편은 '손전등'을 준비했다. 아이들은 가로등으로 볼 수 없는 단지의 구석구석을 손전등으로 비춰가며 뛰어 다녔다. 그렇게 반년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손전등이 식상해질 무렵 남편은 이번에는 '무전기'를 준비했다.
모험탐험대를 떠날 때, 이제는 손전등 대신 무전기를 들고 나간다. 큰 아이와 남편이 한 팀, 작은 아이와 내가 한 팀을 이룬다.
"어딘가, 어딘가, 어딘가." 작은 아이는 늘 똑같은 말을 세 번씩 한다.
"치직...치직... 우리는 지금 놀이터를 지나고 있다. 오버." 큰 아이는 제법 무전기를 사용할 줄 안다.
"알았다, 알았다, 알았다." 역시 작은 아이다.
무전기 소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낏 쳐다본다. 휴대폰을 사용하는 아이들은 많지만, 무전기를 사용하는 아이들은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이 놀이를 아이들은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저녁 무렵 아빠에게 전화를 걸면 "여보세요?"를 하기 전에 "아빠, 오늘 저녁에 모험탐험대 할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
"아빠를 일찍 퇴근시켜주세요" 안타깝게도 모험탐험대는 자주 할 수 있는 놀이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남편의 귀가가 늦기 때문이다. 남편은 평범한 직장인이다. 위로는 상사가 있고 아래로는 후배들이 있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매일 일찍 귀가해서 아이들과 놀아주기를 기대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나는 아빠가 무서웠다. 아빠와 놀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기계 기술자이셨던 아빠는 늘 내가 자고 있을 때 집에 오셨다. 아침에 잠깐 아빠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아빠가 낯설고 어려웠다.
아빠가 일찍 유일하게 오시는 날은 노란 월급봉투를 가져오시던 날이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아빠보다 아빠 손에 들려있던 통닭을 더 기다렸다. 그 때 우리 아빠가 일찍 오셔서 가족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면 나는 아빠를 낯설어하지 않았을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우리 아이들과 남편의 관계를 보면서 문득 궁금했다.
며칠 전 남편은 저녁 8시께 집에 도착했다. 저녁을 거른 남편이 가장 일찍 올 수 있는 시간이다. 현관 문소리가 나자 작은 아이는 무전기부터 찾았다. 큰 아이는 남편에게 달려가 뽀뽀를 한 후 부지런히 외투를 챙겨 입었다. 아이들 성화에 끓고 있던 김치찌개에 불을 끄고 우리만의 모험탐험대를 떠나야 했다.
남편과 첫째가 먼저 집을 나서고, 둘째와 내가 한 팀이 되어 뒤따르며 무전기로 이야기를 나눴다. 선두가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가는 길에는 무엇이 있는지 무전기를 통해서 흘러 나오는 첫째의 목소리는 상기돼 있었다. 배가 고팠던 남편은 동네 떡볶이 집으로 방향을 바꿔 우리에게 알려줬다. 그 날 우리 집 저녁메뉴는 떡볶이와 순대였다.
다음 날, 우연히 청소를 하다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메모지를 보고 나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날 오후 늦게 남편에게 메시지로 사진을 보내주었다. 남편은 그 날도 8시에 집에 들어왔다.
나는 우리 딸이 부럽다. 아빠와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고, 아빠와 즐겁게 놀 수 있는 우리 딸이 부럽다. 지극히 평범한 노동자였던 우리 아버지의 저녁이 좀 더 여유로웠다면 나도 우리 딸처럼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좀 더 친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다만 그것이 아쉽다.
[그 남자 이야기] 딸의 시 한편을 읽고 '칼퇴'한 아빠 이야기 오후 5시에 문자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내가 보낸 문자였다.
"오늘 늦어?"단순히 퇴근시간을 묻는 질문이지만 가끔 짜증이 날 때가 있다. 자신이 없어서다. 내 퇴근시간은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니다. 상사가 퇴근하지 않으면 "먼저 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눈치 O.T(눈치 오버타임)'가 존재한다. 일이 갑자기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글쎄, 현재로서는 바로 퇴근할 수 있을 듯. 근데 왜?""큰 애가 시를 썼는데... 한 번 봐."아내는 작은 메모지를 사진 찍어서 문자로 보내왔다. 그리고 그날 나는 '칼퇴'했다. 시(詩)는 8살 아이가 쓸 수 있을 정도로 단순했다. 두 문장뿐이었다. 그런데 묘한 울림이 있었다. 다음날 나는 시를 SNS에 올렸다. 아는 예술인 한 분은 "와 닿는다"는 댓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