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운영하는 강남의 작은 카페의 모습입니다.
맘상모
존경하는 박근혜 대통령님. 국사에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저는 강남역 인근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자영업자입니다.
1955년, 온 나라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난 저는, 어려서부터 "하늘은 열심히 노력하는 자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아버님 말씀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그야말로 토적성산(土積成山)의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부모님의 뒷바라지로 고교시절부터 서울로 유학을 왔고, 남들 말하는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기업에 입사하여 30여년 근무한 뒤 임원으로 퇴직하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금 숟가락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부러워하는 안정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평생 열심히 노력하고, 산업화 시대 한강의 기적을 함께 일구며 국가발전에 이바지하였다고 자부합니다. 또 많이 부유하지는 않았어도 큰 부족함 없이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늘 이 나라의 국민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반평생을 함께 했던 직장에서 퇴직하고는, 퇴직금에 대출을 더해 노후 및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강남역 인근에 작은 카페를 차렸습니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커피를 내리고 손님을 맞으며 열심히 가게를 꾸렸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저 참 행복했습니다.
가게가 자리 잡아가던 어느 날 찾아온 청천벽력그러나 제 삶이 바뀐 건 한순간이었습니다. 슬슬 가게도 자리를 잡아가고, 커피 내리는 일이 손에 익어갈 무렵, 장사를 한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2013년 6월이었습니다. 건물주의 대리인으로부터 재건축을 해야 하니 가게를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청천벽력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10년이고 장사하라던 말을, 말이 아닌 공식적인 문서로 남겨둘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직장생활 하면서 헛것을 배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변에선 "쯧쯧, 그저 운이 안 좋았다 생각해라"며 안타까워 할 뿐이었습니다. 한 건물에 함께 세를 들어있던 다른 가게 사장들도 한숨을 내쉬기만 했습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때마침 국회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이 11년 만에 개정되어 누구나 5년은 장사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재건축을 할 때도, 최초 계약 때 미리 고지하지 않으면 세입자를 내쫓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거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있습니까. 법이 잘못되었으니 고쳐진 것일 텐데, 법이 개정되기 이전에 장사를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적용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한 숨이 나왔습니다.
평생 남에게 욕먹을 일 한 것 없고, 그저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을 뿐인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싶었습니다. 아내는 매일 기도를 하러 다녔고, 결혼을 앞두었던 아들은 걱정 말라며 위로했지만, 그 얼굴에 드리운 근심은 또 다른 걱정이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대인은 나가라고 소송을 걸었고, 지루했던 소송의 결과 저는 당연히 패소하였습니다. 저는 평생 법을 지키며 살았지만, 법은 전혀 저를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함께 살자고, 억울하다고, 여기저기 호소도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임대인의 집으로, 회사로 찾아다녔지만, 임대인은 만날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대로 삶이 무너지는가." 허망할 뿐이었습니다.
평생 법을 지키며 살았지만, 법은 절 지켜주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