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옥 검사가 지난 1987년 1월 20일 고문경찰관 강진규 경사를 신문하고 남긴 조서 중 일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하지만 검찰은 이날 박종부씨에게 공판조서의 일부만 공개했다. 공개된 자료는 지난 1988년 진행됐던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 재판에 출석한 21명 증인들의 심문내용이었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의 부실수사 논란을 검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료였다.
검찰은 지난 1987년 5월 2차 수사에서 사건 축소·은폐에 깊숙이 관여한 강민창 전 본부장을 "범인 축소 조작에 가담한 혐의가 전혀 없다"라며 무혐의 처분했다. 하지만 6월항쟁 이후 박종철 열사 부검의 일기가 공개되자 지난 1988년 2월 강 전 본부장을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기소함으로써 부실수사를 스스로 인정했다.
"검찰 임무의 중요성 보여준 사건"이라고 해놓고...
박종부씨는 이날 오후 <오마이뉴스>와 전화통화에서 "검찰은 두 차례 자료 신청에도 불구하고 피의자(물고문 경찰관들 5명) 신문조서가 들어 있는 검경 수사기록 등 수사와 관련된 자료들은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다"라며 "이날도 공판조서의 일부만 공개해서 3차로 자료를 신청했다"라고 전했다. 그는 "왜 검찰이 수사기록들을 공개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라고 토로했다.
검찰은 지난 2008년 '검찰 창설 60주년'을 맞아 검사와 직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검찰 60년사의 최대 사건으로 '박종철 고문치사-축소·은폐사건'을 선정했다.
당시 검찰은 '박종철 고문치사-축소·은폐사건'이 "경찰의 고문사실이 은폐됐던 사건으로, 결과적으로는 6·10 항쟁으로 이어져 권위주의 시절이 종식됐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라며 "인권보호기관으로서 검찰 임무의 중요성을 보여준 사건이다"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검찰이 수사를 잘해서 경찰의 고문사실이 드러났고, 이것이 6월항쟁으로 이어져 권위주의체제를 끝장냈다는 평가다. 그런데 7년 전 그렇게 '자화자찬'했던 사건의 수사기록을 왜 공개하지 않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검찰출신 대법관 후보 지키기'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야당 "검찰출신 대법관 후보자 지키기 의심"새정치연합과 정의당 등 야당은 검찰의 수사기록 공개 거부를 쟁점화하고 나섰다.
서영교 새정치민주연합 대변인은 "박 후보자가 또 다른 고문 수사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수사하자고 용기 있게 제기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사기록을 달라고 했는데 검찰이 내놓고 있지 않다"라며 " 개인정보 위험이 있다며 내놓지 않고 있는데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말했다.
서 대변인은 "고문수사관이 더 있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검사자격 박탈이다"라며 "민주화를 외치다 고문을 당하다 죽어간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을 덮고 가자고 한다면 이것은 역사를 역행하는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김종민 정의당 대변인은 "유족이 요청한 자료들을 보면 박 후보자가 이 사건 수사와 관련해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가 분명해진다"라며 "그런데 검찰은 엉뚱한 자료만 내놓고, 아무런 해명 없이 유족이 요청한 자료는 내놓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검찰이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검찰 출신 대법관 후보자 지키기'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박 후보자가 이 사건(부실수사)과 무관하다면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수사기록 공개를 촉구했다.
[관련기사] 박종철 열사 형 박종부씨 인터뷰 "박상옥, '막내검사'였다고 책임 비켜설 수 없다"검찰은 왜 '박종철사건 수사기록' 공개 거부했나?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3
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