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하니'의 문자를 받고 바라나시 메인가트에 도착했을 때 푸자의식이 한창 열리고 있었다.
송성영
힌두대학교 안에 자리한 힌두 사원에 갔을 때도 그랬다. 사원에 들어서기 전에 자신의 아내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던 이 선생이 사원을 나오면서 커다란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네주었을 때 나는 사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보잘 것 없는 작은 꽃 한 송이를 주워 부끄럽게 내밀었다. 힌두 대학 식당에서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며 이 선생이 내게 물었다.
"송 선생님은 뭘 먹으실래요.""나는 두 사람 먹는 거 같이 먹을게요. 아무것이나 먹어도 상관없어요." "왜 그리 우유부단합니까.""음식 이름도 모르고 그냥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없네요.""거참, 나약하시네요. 줏대도 결단력도 없고..."이 선생이 자꾸만 면박을 주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이글거리는 태양, 후덥지근한 날씨 탓일까. 내 귀에는 빈정대는 말투로 들려왔다. 바라나시에서 만날 때부터 그랬다. 나는 나이를 따져가며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에서는 나보다 나이가 세 살 정도 아래인 것으로 말해 놓고 인도에 와서는 동갑내기라 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달려라 하니' 그녀 앞에서 종종 허세를 부리는 듯했다. 그가 나에게 나약하고 줏대도 결단력도 없다고 말하는 순간, 단순히 강렬한 햇빛 때문에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 '이방인'(알베르 카뮈의 소설)의 주인공 뫼르쏘가 떠올랐다. 더 이상 참지 못해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내가 나약하다고 결단력이 없다고 하는데 젊었을 때 나도 꽤 독종이었어요. 내가 흐물흐물 거리니까. 사람들은 군대 얘기가 나오면 내가 방위 출신인 줄 안다니까요. 너무 그러지 말아요. 이래 봬도 고등학교 때 이미 태권도 사범을 했고, 군대에서는 특수부대에서 있었습니다." 흥분된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그 지긋지긋했던 폭력의 시절을 과시하고 말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강렬한 햇빛 때문이 아니라 '달려라 하니'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 앞에서 내 자신을 과시하며 이 선생에게 속좁게 대응하고 있는 내 자신이 싫었다. 돈을 표시 나게 잘 쓰는 사업가인 그는 본래 친절한 성품이었다. 반면에 무언가를 내게 끊임없이 가르치려 했다.
그런 말 많은 이 선생과 '달려라 하니'와 함께 어딜 가게 되면 속좁은 나는 '참을 인'자를 머릿속에 새기며 가능한 입을 닫고 있어야 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미묘하게 벌어지는 이런 부질없고도 치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눈병도 눈병이었지만 오후 내내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푸자 의식을 보고 나서 우리 일행은 바라나시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달려라 하니'와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 근처의 작은 라이브 음악 카페로 향했다. 나는 이 카페에서 50루피 정도의 인도의 전통 음료 '라씨'나 좀 무리해서 캔 맥주 한 개를 시켜놓고 인도의 전통음악을 감상하곤 했다.
카페에는 내가 눈 인사로 사귀었던 인도 악사가 있다. 그는 우리 악기로 치자면 대금에 해당하는 인도 전통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카페로 가는 도중에 나를 어리석은 인간으로 몰아 세워가며 끊임없이 가르치려 들고 있는 이 선생에게 또다시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전직이 선생님이었습니까?""아니요." "왜 자꾸만 가르치려고 합니까."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는 나를 궁지에 몰거나 면박을 주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냥 자신의 성품대로 친절을 베푼다는 것이 그렇게 비쳤을 것이었다. 신이 있다면 신이 그를 통해 내 자신을 바라보게 하려는구나 싶을 정도로 그는 끊임없이 옹졸한 내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이 선생을 통해 나를 보았다. 이 선생이 나를 대하는 것과는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나 또한 이 선생과 다름없었다. 얼치기 진보주의자인 나는 나와 정치적인 성향이나 성품이 다른 아내를 내 식대로 따라 주기를 바랐다. 옳고 그른 잣대를 들이대 가며 끊임없이 가르치려 했다. 아내는 그런 내가 지긋지긋했을 것이었다. 화가 났을 것이었다.
카페에 들어서자 인도 사내가 악기 연주를 하고 있다가 나를 알아보고 눈인사를 한다. 나는 그를 바라나시에 머물면서 서너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내 나이와 엇비슷해 보이는 그는 나를 만나면 영어로 '어이, 나의 친구'라고 반기곤 했다. 그는 바라나시를 중심으로 한 자리에서 한두 달 정도 머물러 가며 리쉬케시, 마날리 등의 인도 각지를 떠돌고 있다고 했다.
연주를 마치고 난 그는 카페 손님들에게 음반을 권한다. 내가 손을 들어 보이자 그는 우리 일행이 앉아 있는 탁자 쪽으로 다가와 내게 다정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자신의 연주곡이 담겨 있는 음반을 내밀었다. 두 장에 300루피라고 한다. 동행 했던 한국인 청년이 인도 사내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한국말로 빈정거렸다.
"이거 음질도 안 좋을 것인데, 너무 비싸요. 백 루피면 살 수 있을 텐데." "한때 밴드를 했다는 젊은 사람이 그러면 쓰나. 내가 살 거니까 걱정 마요.""송 선생님이 나무에 거름을 많이 주면 위험하다고 했잖아요."한국인 청년은 내가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드는 한국인 여행자들을 나무랐던 것을 비꼬고 있었다. 나는 내 친구를 욕하는 것 같아서 날을 세워 말했다.
"그런 경우 하고는 다르지요, 값싼 음식을 골라 하루에 한두 끼 먹는 내가 돈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니까요. 나는 이 분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또 노래하는 내 아들이 생각나서 구입하려는 것입니다." "몇 푼 안 되는데 내가 사 드릴게요."이 선생이 불쑥 나섰다.
"내가 꼭 사고 싶은 이유가 있어서 그러니까 내가 살게요.""제가 사드린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