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화대학교 건축학원 로비의 전시공간
김소연
교수야, 부동산업자야... 헷갈리는 중국 교수들교수 연구실에 놀란 내가 그 다음으로 입이 쩍 벌어진 것은 그들이 받는 월급이었다. 칭다오 이공대의 경우 직급에 따라 4000위안에서 10000위안 사이인데, 학원장이 10000위안 정도를 받는다. 수당은 직급에 따라 다르게 책정된다. 대졸자 초임이 보통 3000위안이고 중학교를 졸업한 농민공이 2000위안 정도이니,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 월급치고는 너무 낮다. 하지만 교수들은 주택을 제공받고 월급 외에 다른 소득원이 있다.
건축학과 교수들의 경우, 설계원에서 실무 프로젝트를 한다. 지방 정부 사업부터 건설회사 협업까지 두루두루 참여하면서 부수입을 올린다. 유명한 교수라면 여기저기에서 들어오는 프로젝트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그러니 같은 교수라고 해도 수입이 천차만별이다. 어떤 교수에게는 월급이 생활비이고 어떤 교수에게는 월급이 용돈이 된다.
부수입에 열을 올리는 교수는 학교 안의 일보다 학교 밖의 일에 더 신경을 쓰느라 학생 교육에 소홀해지기 쉽다. 하지만 그런 교수에게 대학원생들이 더 몰린다. 외부 프로젝트가 많은 교수일수록 '관시(关系, 인맥)' 범위가 넓으니 취업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월급과 부수입 모두 낮은 그룹은 역시 젊은 교직원이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하여 아르바이트를 뛰기도 한다.
교수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그들의 주택에서도 나타난다. 학교에서 지급되는 푸리방(福利房, 일종의 복지주택)을 재테크 수단으로 활용하면 상당한 금액을 챙길 수 있다. 푸리방은 원래 계획경제 시대의 산물이다. 신중국 건립 이후 직장인 단웨이(单位)마다 푸리펀방(福利分房)이 있었다. 국가가 직장별로 주택을 건설하면 단웨이가 직원들의 직급, 경력, 가족 수, 나이에 따라 주택을 분배하는 제도였다. 푸리펀방은 개인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매매나 교환이 불가능했고, 임대 형식이었지만 그 액수는 무상에 가까웠다.
그런데 1990년대에 국유기업이 개혁되는 과정에서 단웨이가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그 때 자금을 확보하려고 단웨이는 부동산을 헐값에 처분했다. 급한 나머지 직원들에게 한꺼번에 여러 채의 집을 강매하기도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당시 울며 겨자 먹기로 집을 샀던 사람들은 나중에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한 몫을 단단히 챙길 수 있었다.
1990년대 말에 정부가 주택정책을 시장경제 체제로 바꾸면서 푸리펀방이 폐지되고, 개인이 직접 돈을 주고 주택을 구입하는 상핀팡(商品房, 일종의 상품주택)이 생겼다. 차츰 주택거래 시장이 형성되자, 이때를 틈타 부동산 개발업체, 땅을 소유한 정부, 대출을 하던 은행이 서로 협력하면서 부동산 열풍이 일어났다.
푸리펀방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남아 있다. 칭다오에서 들었던 푸리방은 국유기업이나 대학교 같은 곳에 있었다. 예전의 푸리펀방과 다른 점은 모든 직원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근무기간이나 직위를 따져 선별하고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다. 아주 싸게 살 경우 상핀방의 1/10 가격으로 살 수 있다.
주택 소유권은 처음에는 해당 직장에 있지만 5년이 지나면 개인 소유가 되고 매매도 할 수 있다. 이 때 매매가는 주택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핀팡 가격으로 된다니, 살 때와 팔 때의 차액이 엄청나다. 이미 집 한 채가 있는 사람이 푸리방을 얻으면 상핀팡의 가격으로 세를 놓아 임대료를 받거나 적당한 때에 팔아서 큰 수익을 거둘 수 있다. 맞벌이 부부가 각자의 직장에서 푸리방을 받게 되면 로또 당첨이 따로 없다.
문제는 푸리방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이 직급에 있기 때문에 정작 월급이 적고 직급이 낮은 젊은 교원에게는 그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다. 듣자하니 연배 높은 교수들 중에는 주택을 두 채 이상 가진 사람이 제법 있다고 한다. 오래 전에 받은 교내 푸리방 하나, 제2캠퍼스를 신축할 때 만든 초고층 아파트 푸리방 하나, 여기에 맞벌이 배우자가 가진 주택까지 합치면? 표면의 월급에 벌어졌던 내 입은 이면의 재산에 더 크게 벌어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