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 먹는 아이들. 사진은 지난 2010년 3월 10일 오전 경기도 평택 갈곶초등학교에서 3학년 학생들이 무상으로 제공된 급식을 먹고 있는 모습.
유성호
일부는 복지축소나 '선별복지'를 주장하며 '이건희 손자'를 들먹이기도 한다. 이건희 손자에게 왜 '공짜밥'을 먹이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희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공립 초등학교와 중학교 다니는 것을 막아야 할까? 누구든 자식을 값비싼 학교에 보내는 것은 자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상 의무교육 혜택을 빼앗을 수는 없다.
재벌가 사람들도 (원하면) 지하철이나 버스 이용이 가능하고, 교통카드에 같은 금액이 찍히는 것으로 안다. 이 회장이 애용하는 마이바흐도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같은 요금을 낼 것이다.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몽준 전 의원은 2조 원 대 재산가이지만, 국회의원 재직 당시 세비를 꼬박꼬박 타간 것으로 알고 있고, 이것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월급을 반납하거나 자선에 쓰는 것은 그의 자유다.
이건희 손자가 군대에 간다고 생각해 보자. 잘 모르겠지만, '이건희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무상짬밥' 혜택을 빼앗으며 '도련님은 PX에서 사 드세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그가 군대에 가게 될지는 별개의 문제다. 삼성가의 군 면제율이 73%에 이르기 때문이다.
나는 군 생활이 '꼭 해봐야 하는' 경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생각은,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는 것만큼 신화적 이야기다. 도리어 군에서 '비인간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맹목적인 복종과 물리적 폭력, 비민주적 효율, 정의 대신 힘에 순응하는 비겁함을 체화하기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사회에 퍼져 있는 폭력성과 비민주적 소통구조의 원인 중 하나가 사회 곳곳에 스며든 군대문화라고 믿는다. 따라서 군을 이상화하고 낭만화하는 보도와 오락프로그램에 큰 우려를 갖고 있다. 군대가 무의미하거나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다. 사회가 집이라면, 군대는 울타리 위의 가시철망 같은 존재다. 철조망은 고마운 존재지만, 담 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철조망을 거실과 아이들 공부방에 치는 것은 학대이며, 아름다움을 흠모해 몸에 두르고 다닌다면 '변태'다.
어쨌든 군생활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의무이기에, 복무, 보상, 면제의 절차는 합리적이고 공정해야 한다.
예수도 베푼 '무상의료'와 '무상급식'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했다. 그가 '종북'이나 '좌빨'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그런 면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이익을 추구하다보면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달라져도 비인간적 탐욕을 버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예컨대 <마태복음>에는 예수를 흠모하는 젊은 부자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예수에게 와서 구원의 길을 말해주십사 부탁한다. 답변은 간단했다.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하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했다.
부자 청년은 낯빛이 어두워져 돌아갔다. 예수를 아끼는 사람조차 제 재산은 '하늘의 축복+예수를 따르는 일'과도 맞바꾸기 어려운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에게 베푸는 것'과 '신에게 바치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는 말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예수가 오늘 한국사회에 살았다면 어떤 욕을 먹었을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예수는 그저 '남을 도우라'고 말만 하지 않았다.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 수시로 '무상의료'를 베풀었고,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대규모 '무상급식'을 펼치기도 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는 기적 말이다.
처음에는 예수의 제자들도 '무상급식'에 반대했다('무상급식 반대'의 원조는 새누리당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각자 사먹으라고 하자'고 제안했다. 예수가 '그냥 주라'고 하자, 제자들은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어떻게 먹이냐'고 항의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부분은 '모두'에게 먹였다는 사실이다. 마른 사람이나 통통한 사람, 배가 들어간 사람이나 나온 사람, 아침을 거르고 나온 사람이나 배터지게 먹고 나온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복지에 '기적'은 필요 없다국가 정책은 종교적 기적과 다르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옳은 말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서는 성서학자마다 의견이 갈린다.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 문학적 비유라고 말하는 사람, 잘못된 번역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 사실이지만 '기적'은 아니었다는 등 여러 입장이 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의 '사실이지만 기적은 아니다'라는 견해다. 예수는 맨손으로 기적을 베풀지 않았다. 우선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음식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게 했다. 그때 나온 것이 소년이 싸 온 떡과 생선이었다. 예수는 이것을 들고 무리들 앞에 섰다. 앞의 학설에 따르면, 소년이 용감하게 도시락을 나누는 것을 보자, 부끄러워진 어른들이 감춰놓았던 음식을 슬그머니 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사람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의 음식이 남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복지를 '그냥 준다'고 약속했지만, 나는 그가 기적을 펼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기적은 필요없다. 한 나라의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면, 모두에게 돌아갈 충분한 음식이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숨겨져 있다는 것이고, 숨긴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탐욕'을 가진 부자들이 존재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정부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처럼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부지런히 일하는데도 한 사람당 3천만 원의 연소득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누진세 강화는 베풀지 못하는 강퍅한 부자들에게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는 선행인 동시에, '바늘귀'를 넓혀주는 일이다.
부자, 가난한 이 가리지 말고 밥을 먹여라. 더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더 내게 하라. 그때 모두가 행복해지는 '국민 행복시대'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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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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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향한 예수의 '경고'... 아프게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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