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때의 중국 광주(광저우) 해관(세관). 이 해관은 은이 세계 통용 화폐이던 시절에 청나라 대외무역의 거점 중 하나였다.
김종성
우리도 당연히 은 시스템에 참여했다. 몽골이 세계를 제패할 때는 고려가 참여했고, 명나라·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할 때는 조선이 참여했다. 조선은 정부 간 혹은 비(非)정부 간 무역을 통해 중국제 물건을 사들이고 그 대가의 상당 부분을 은으로 지급했다.
그런데 조선이 지급한 은은 조선 자체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일본의 은이었다. 일본은 은과 동이 풍부한 나라였다. 중국과 국교가 단절된 1551~1871년 시기에 일본은 조선과 무역을 통해 은 시스템에 참여했다. 조선은 일본에 주로 중국제 비단을 팔고, 일본은 조선에 주로 은을 제공했다. <조선명탐정>의 배경인 18세기까지만 해도, 조선과 일본은 이런 식으로 은 시스템에 참여했다.
<조선명탐정>의 시대에 '은 시스템' 지켰다면...13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힘에 의해 유지된 은 시스템은 중국이 아편전쟁(1840~1842년)에 패배하면서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경제 최강대국인 중국을 무역이 아닌 전쟁으로 제압한 영국·프랑스 등 서유럽 열강이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은 시스템을 그냥 놔둘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은 시스템에 대한 파괴에 나섰다. 그 결과가 20세기 초반의 금본위제 정착이었다(순금 1온스=391.20달러(1993년)라는 식으로, 통화의 가치를 금의 가치에 연계(連繫)시키는 화폐제도 - 네이버 지식백과).
서유럽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던 것은, 16세기 이래로 아메리카·아프리카에서 공짜 화폐 및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것으로 기반으로 동아시아와 무역을 해서 국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서유럽의 과학혁명·산업혁명·시민혁명 등은 이런 불공정행위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렇게 축적된 기술력과 군사력으로 중국을 아편에 취하게 만든 뒤 전쟁으로 제압하고 세계 패권을 쥔 것이다.
일본도 이런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변방 신세에 머물던 일본은 동아시아 중심의 은 시스템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이들은 19세기 후반에 금본위제 시대를 향한 작업을 서둘렀다.
1880년대 및 1890년대의 중국 해관(세관) 자료에 부록으로 딸려 있는 조선 세관 통계에는,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대량의 금을 반출하는 사례가 많다는 경고의 글이 실려 있다. 당시 조선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지만, 일본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느라 조선의 금을 빼내간 것이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 역시 조선의 금에 눈독을 들였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것은 새로운 시대를 위한 그들 나름의 준비였다.
<조선명탐정>의 시대적 배경은 서양인들이 동아시아 중심의 은 시스템을 파괴하기 얼마 전인 것이다. 만약 이 시대에 조선과 중국이 동아시아 중심의 시스템을 잘 지켰다면, 아마도 오늘날 서양 중심의 올림픽 대회가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올림픽 대회가 열린다 해도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이 1등의 몫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명탐정> 시대의 진정한 문제점은 조선 땅에서 불량 은이 유통되는 게 아니다. 서유럽인들이 불법적으로 착취한 은과 노동력을 기초로 동아시아와 거래하고 있으며, 이것이 동아시아 중심의 은 시스템을 점차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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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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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는 <조선명탐정>? 제대로 헛다리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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