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적기 바쁜 '전문가'와 '인재'들. 회의는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일 텐데,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는 모든 회의는 '받아쓰기 대회'가 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비전문가 한 명의 말을 정신없이 베끼는 웃지 못할 장면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YTN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인재 중의 인재'로 골랐을 게 틀림없는 이완구 총리를 보라. 그는 이틀은 고사하고 두 시간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대통령 발언으로 시끄러웠던 2월 10일은 그의 인사청문회가 있던 날이기도 하다. 야당 의원이 제보내용을 거론하며 기자들을 협박해 불리한 보도를 막지 않았냐고 추궁하자, 그는 정색을 하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원님, 제가 한 나라의 국무총리 지명자입니다. 아무려면 제가 청문회 통과여부를 떠나서, 제 정치적 소신, 인격, 그리고 제 나름대로의 모든 걸 걸고 그렇게 얘기했을 리가 있겠습니까."후보는 "그런 녹취록이 있으면 공개해 달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곧 스피커로 "이것들 웃기는 놈들 아니여 이거..."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는 분연한 표정을 순박한 미소로 바꾸며 말했다. "현재 제 마음가짐이, 기억 상태가 조금은 정상적이지를 못합니다. 3일째 수면을 취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착오나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고는 생각을 합니다."
피곤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인지, 피곤해서 한 말을 기억 못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저 목소리는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청문회장에 앉아있기보다 진료실에 누워있어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병원 분위기'가 아주 없던 건 아니다. 녹음내용이 공개된 후, 야당의원이 "이제 그런 발언을 한 기억이 있습니까"고 묻자, 그는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고 답하지 않았던가.
대통령의 '빈말'이 재앙인 까닭"모든 걸 걸겠다"던 이완구 후보는 뻔한 위증을 하고도 "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제 국민들은 총리가 일을 잘 하는가보다, 그가 잠을 잘 자고 있는지를 더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가 중대 발언을 할 때마다 이렇게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잘 주무셨어요?" 피곤한 상태에서 두 시간 전 일을 기억하는 것은 범인의 능력 밖이라 치자. 잠도 잘 잔 '인재'들이 대통령의 그 쉬운 말을 듣고도 발언을 '했네', '안 했네' 하며 싸우는 기이한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할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대통령 자랑과 달리, 주위 사람들 지적능력이 "최고"가 아니거나, 대통령의 말이 애초에 해독 불가능하거나.
더욱 안타까운 건, 대통령조차 자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과거 '골프 활성화'를 요구하는 제안을 무시하거나, 대놓고 "골프 칠 시간이 있느냐"고 말했었다. 하지만 최근 태도를 바꾸어, "골프 활성화에 대해서도 방안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팔을 걷고 나섰다. 청와대 참모진을 상대로 "골프 칠 시간이 있느냐"고 한 과거 발언이 '골프 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골프 칠 시간이 있느냐'가 금지령이 아니라면, 다른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①실제 질문이거나 ②제안의 의미를 담은 수사의문문이다.
"골프 칠 시간 있나요?" "예, 많아요.""골프 칠 시간 있나요?" "저는 언제든 좋아요. 며칠로 '라운딩' 날짜를 잡을까요?"과거의 사소한 말을 끄집어내어 트집을 잡으려는 게 아니다. 대통령의 말은 결코 '빈말'일 수 없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든, 지도자의 말에는 막중한 무게가 실린다. 대통령의 발언은 그저 '말'이 아니라, 짧게는 국가 정책을, 멀리는 한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의례적인 신년사조차 우방의 어느 나라를 먼저 언급했네, 무슨 단어를 몇 번 사용했네 하며 치밀한 분석 대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통령이 과거에 한 말을 대충 넘기라고 요구하는 것은, 대통령의 존재를 심각히 여기지 말라는 것과 같다. 이런 주문은 지도자 자신에게 가장 큰 모욕이 될 것이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한 사람의 사고능력은 그 사람이 쓰는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그의 말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말에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어제 말해놓고 오늘 나 몰라라 하거나, 두 시간 전에 제가 한 말을 부인하는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들이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인이 되는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 자신의 삶뿐 아니라 사람의 삶까지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이는 세월호 사고를 통해 우리가 뼈저리게 깨닫게 된 사실이다.
대통령의 진짜 배신은 따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