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경상도> 중 한 장면. 개인의 회상을 만화로 엮은 이 책은, 작가의 과거를 통해 당시의 시대를 함께 돌아본다.
창비
친구와 딱지치기를 하다가 '상대방이 잃은 딱지를 모두 돌려주는' 갑효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어른스럽다. 누군가를 패자로 만들면서 성취감을 얻으려 하지 않았던 점 때문일까. 반면 반장이 되고나서 권력 남용으로 친구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스스로를 '낙하산 인사의 폐해'라고 적은 부분에서는 피식 웃음이 난다.
또한 여러 친구들을 만나고, 또 멀어지는 과정도 찡하게 표현했다. 어린 시절의 뜻하지 않은 만남과 헤어짐을 그리면서, 작가는 그 경험들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감정을 자아내는지 덤덤하게 적는다. 감정과 사실전달에 있어서 절제된 연출을 통해 매력이 전달되는 것이 장점이다. 유쾌한 표현법과 섬세한 감성이 잘 조화된 만화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가 진행되는 동안, 꼬마인 갑효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다. 본문에서 묘사된 갑효 아버지는 법과 종교보다 자신의 주먹을 더 믿는 사람이다. 대구에서 '화창화장지'를 운영하면서 시비를 걸어오는 불량배들을 직접 혼내주고, 밤마다 통행금지가 이루어지던 시기에도 이를 무시하곤 했다고 한다. 집안에서 마초적이고 퉁명스러운 아버지. 하지만 동시에 가족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갑효는 상반된 감정을 느낀다.
어느날 늦은 밤, TV에서 다큐멘터리로 '광주 민주화 항쟁'의 실체를 뒤늦게서야 본 갑효는 충격을 받는다. 그러다가 8년동안 누구도 1980년에 벌어졌던 5·18에 대해서 아무도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또 한 번 혼란스러움을 겪는다.
그러면서 그는 결론내린다. '침묵은 답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갈등이 해소되는 것과 이를 외면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개인의 삶을 회상하면서 만화로 엮은 이 책은, 작가의 과거를 통해 당시의 시대를 함께 돌아본다. 더불어 오늘날의 '지역감정'을 씻어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도 언급한다.
'침묵의 빚'을 청산하려면"많은 사람들은 이 '침묵의 빚'이 마음에 걸려서 자신의 선택을 더 고집하는 것 같심더. 나의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을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지 않습니꺼? 똑바로 보고 개선하는 것과 이전의 선택을 더 강하게 고집하는 것 말입니더. 후자를 선택하면 안 되는 것 아니겠심니꺼?" (본문 226쪽 중에서)갑효는 아버지에게 묻는다. 그 날의 광주를 알고 있었느냐고, 왜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았던 것이냐고. 아버지는 대답한다. "묵고 살아야 될 거 아이가? 묵고 살아야..." 결국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용감했던 아버지도 '먹고사니즘' 때문에 정치와 역사의 문제를 눈감고 살았던 것이다.
'생존'이 최우선의 화두였던 당시 세대를 돌이켜보면, 개인의 선택을 모두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불안한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은, 개인의 삶을 놓고 볼 때는 일견 수긍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갈등을 다시 물려줄 수 없기에" 그런 논리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누군가 짓밟히는 광경을 외면하면서 번영할 수 있었음을 알게된 이상, 이제는 '침묵의 빚'을 청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린 겨울같았던 80년대가 90년대라는 봄으로 가는 길목이었다는 작가의 말이 인상깊다. 그리고 오늘날, 그 봄과 겨울을 떳떳하게 추억하기 위해서는 질끈 감은 눈을 떠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보수적이다', '배타적이다', '텃세가 심하다', '남성우월적이고 가부장적이다'라는 수식어로 요약되는 경상도에 대해서 작가 김수박은 사소한 일화들로 조심스럽게 성찰을 시도한다. 차별과 외면, 그로 인해 자라난 지역감정을 언제까지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경상도는 도대체 왜 그러냐'는 의문을 갖게 한 특성들이 '공간'이 아닌 '시간'의 문제였음을 보여준 것으로, 만화 <메이드 인 경상도>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성일 것이다.
메이드 인 경상도
김수박 지음,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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