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국가보안법 위반 등 사건 재심에서 무죄 선고받은 재일동포 간첩사건 피해자 이철 씨
유성호
-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일 텐데, 혹시 고문당하던 상황이 어땠는지 설명해줄 수 있는지….
"어… 무조건 들어가면 빤스까지 다 벗긴다. 알몸이 되어가지고, 수치스러운 상태에서 구타를 당한다. 때리고, 차고, 잠도 못 자게 하고. 심지어는 야전침대에 나무기둥이 있었는데, 그걸 뽑아서 날 마구 때리니까 그 탄탄한 나무가 부러졌다. 그리고 벌거벗은 내 성기를…(말하길 주저하면서 입술에 침을 바름) 붙잡아서 담뱃불로 지지려고 하고….
제일 힘들었던 것은…(조심스러워함) … '네가 (혐의를) 인정 안 하면 약혼녀랑 장모를 데려와서 네 눈앞에서 범하겠다, 그리고 한강에 버려도 우리한테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협박을 했다. 그래서 내가 '제발 그러지 말라고, 모든 걸 시키는 대로 할 테니 그렇게 하지마세요'라고 정말로 빌었거든. 그걸 생각하면…제일 괴로웠는데…."
- 당시 부인도 간첩방조죄로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장모님이 두 사람 옥바라지하느라 고생 많이 하셨다고 들었다. 또 일본에 계신 부모님들도 충격으로 세상을 뜨셨다고."우리…어… 우리 아버지는…(천천히 말을 이어감)… 내가 잡혀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쓰러지지 않았는데, 약혼녀까지 연행됐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왜 며느리가 끌려가느냐'며 쓰러지셨다가 일주일 정도 뒤에 나와 집사람 둘 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날 밤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어… 몇 번씩 면회를 오셨다가… 내가 1979년도 8월 15일에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고 대전교도소로 옮겨진 지 얼마 안 됐을 때 돌아가셨다. 내가 잡힌 뒤 한 5년 사셨나? 부모님 다 충격 받아서 돌아가신 거다. 원래 건강하신 분들이었는데.
그런데… 음…(눈시울이 촉촉함) 우리 장모님은, 내가 왜 고맙게 생각하냐면, 하나밖에 없는 딸이 사윗감이랑 같이 (감옥) 안에, 그것도 간첩죄로 들어갔다. 장모님은 내가 사형 선고받으니까 법정에서 기절하시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를 원망하지도 않고, 욕하지도 않으셨다. 보통은 '이철 때문에 우리 가족이 망했다'며 울고불고 할 거다. 내가 1심 끝날 때까지 면회 금지였는데 수시로 양말, 내복 같은 것 넣어주시고, 면회가 가능해져서 장모님 뵈었을 때 '아이고 어머니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괜찮다, 건강하게만 있으면 괜찮다'고 하셨다. 나를 원망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하시더라.
장모님 때문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그러면 사형이 집행되어도 '저 나쁜 놈이 죽었지만 영혼만은 구원됐다'고 안심하실 것 같았다. 또 장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는데, 참 좋아하시더라. 이후에는 김수환 추기경님께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때 추기경님의 말씀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나이 젊은 재일동포 학생들이 왜, 무슨 일을 했기에 사형선고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2000년 전에 예수님도 당시의 국가보안법으로 죄 없이 돌아가셨으니까 여러분도 용기를 내라.' 나로선 충격적이었다. '아 이 분은 우리가 죄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구나.' 이후 진짜배기 가톨릭 신자가 됐다(웃음)."
"세월호 희생자 영정 앞에서 많이 울었다"- 장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장모님이 정말 나한테 잘해주셨거든요. 민주화운동하는 학생들도 우리(재일동포)랑 친해지면 손해볼까봐 가까이 안 하려고 했다. 그때는 우리가 (독재정권에) 이용당했다는 것을 몰랐으니까, 진짜 간첩인 줄 아는 사람도 많았다. 우리 장모님이 1985년에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 생기자 이미 출소한 약혼자와 함께 활동하셨다. 그러면서 계속 재일동포 양심수, 이 억울한 사람들의 존재를 호소하셨다.
일본에서 재일동포 간첩사건 피해자 가족이나 구명운동하는 사람들이 오면 안내해주시고, 통역해주시고. 결혼 전 오사카에 사셔서 오사카 사투리를 아주 잘하셨다(웃음). 한국에선 사람들이 '장모, 장모' 했는데, 일본에선 '재일동포 구속자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만큼 어머님이 열심히 하셨으니까. 내가 출소하고 나서도 '빨리 명예회복 되어야 하는데' 하시다가 딱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어제 무죄 받고 어머니께 보고하러 다녀왔다."
- 성묘 다녀오는 길에 안산에 들렀다고."세월호 희생자들에게 헌화하고, 향도 피우고 왔다. 세월호 참사는 엄청 큰 불행이죠.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냐. 나는 오늘 학생들 영정이 끝에서부터 끝까지 있는 걸 보면서 '아휴 이 사람들이 아무 죄도 없는데… 선박회사나 비뚤어진 시스템 때문에 희생됐구나' 했다. 그리고 300명 넘는 사람들이 한 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었다는 것을 그 앞에 서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겠더라. 우리 가족하고, 이번 재판을 함께 보러 일본에서 온 친구 10여 명이 함께 갔는데 다들 영정 앞에서 많이 울었다. 너무 가슴 아프더라. 정말로 정부가 보상을 떠나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분명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인터뷰] "원세훈 붙잡힌 날, 40년 만에 무죄 나왔다"[일문일답 전문②] 야만의 시대 지났지만... "옛날의 희생이 희미해져가는 듯"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공유하기
"매맞고 거물간첩으로... '약혼녀 협박' 제일 괴로웠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