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초등학교 전경.
선대식
남한산성 도립공원 한가운데에 있는 남한산초는 인구 감소로 2000년 학생수가 26명까지 줄었다. 2001년 폐교 방침이 떨어졌다. 하지만 인근 성남지역 주민들은 폐교를 안타까워하면서 학교 살리기에 나섰다. 뜻 있는 교사들을 모셔왔다. 학교 전입학 운동을 벌여, 학생수를 늘렸다. 폐교 결정은 취소됐다.
이곳으로 온 4명의 교사 중 한 명인 김영주 남한산초 교장은 "교사들은 기존 학교에서 자유로운 소통이 어려운 탓에 학생들이 힘들어하고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면서 "주번, 상장, 벌점, 조회, 중간·기말고사 등 안 좋은 것들을 버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80분 수업, 30분 쉬는 시간'의 블록수업, 학생 자치회인 '다모임' 등을 마련했다.
학생들은 숲속에서 마음껏 뛰어놀았다. 곧 학생들이 자유롭고 행복한 학교라는 입소문이 퍼졌다. 입학 문의가 쏟아졌다. 신도시 아파트를 팔아 학교 앞에 반지하방을 얻은 학부모도 있었다. 역시 초기 4명의 교사 중 한 명인 안순억 운중초등학교 교감은 "몰려오는 학생들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공교육이 무너져 있었다"고 회상했다.
1990년대 학교는 큰 위기를 맞았다. 권위주의적 모습이 남아 있는 학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했다. 학교를 그만두거나 조기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이 늘어났고, 교실 붕괴 현상으로 이어졌다. 1995년 김영삼 정부는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5·31 교육개혁안을 내놓았지만, 정확한 처방전이 되지는 못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학교에서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1989년 창립된 전교조는 교사 1500여 명이 해직되면서도 입시 위주 교육과 교육 불평등을 바로잡으려는 참교육 운동을 벌여, 국민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학교 민주화가 확산됐고, 학교 개혁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1990년대에는 대안학교 운동이 급물살을 탔다. 원조 대안학교인 충남 홍성 풀무학교, 전남 영광의 영산성지고등학교와 '직업선택 10계명'으로 유명한 경남 거창고등학교는 대안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안순억 교감은 "5·31 교육개혁에 대한 비판 목소리, 전교조 참교육 운동과 대안교육 운동은 남한산초를 만든 기반이 됐다"고 밝혔다.
확산되는 혁신학교, 그 미래는?남한산초의 실험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충남 아산 거산분교, 전북 완주 삼우초등학교 등 전국의 작은 학교들에서 변화가 시작됐다. 이들 학교에는 학생들이 몰렸다. 특히, 경기도 성남과 양평 등지에서 '새로운 학교'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커졌다. 2007년부터 시범적으로 시행된 교장공모제는 이러한 움직임을 가속화 시켰다.
2009년 학교 개혁 운동은 대전환을 맞았다. 이 해 4월 경기도교육감 보궐선거는 사상 첫 직선제로 치러졌다. 김상곤 후보는 남한산초 모델을 제도화한 혁신학교 공약을 내걸고 당선됐다. 그해 9월 13개 학교가 혁신학교로 지정됐다. 이후 혁신학교는 무너진 공교육의 대안으로 인정받았고 크게 확산됐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김상곤 교육감을 포함해 6명의 진보교육감이 당선된 뒤, 혁신학교는 전국으로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