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서해교차로 박영미 기자
매거진군산 진정석
영미는 '생물학적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주 어려서 헤어졌다. 영미 남매는 아버지와 살았다. 영미가 초등학교 때, 아버지와 재혼한 '그 여자'가 들어왔다. 그 여자는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몽둥이질을 했다. 영미는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대 당했다. 잘 먹지 못해서 가냘픈 10대 소녀는, 매 맞을 때마다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 체육복이랑 준비물 사야 해요. 3만 원이 필요해요."전북 김제 덕암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초, 영미는 한 달째 앓고 있던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영미에게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줬다. 산송장처럼 야윈 몸을 이끌고는 공사 현장으로 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몇 시간 뒤, 영미는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가 가진 현금 전부를 영미에게 주고 갔다는 것도.
영미 남매는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나서 고모한테 갔다. 일찌감치 혼자 몸으로 아이 둘을 키우고 있던 고모는, 서른네 살에 아이 넷이 되었다. 업종을 바꿔가며 삼겹살집, 통닭집, 해장국집, 호프집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식구 다섯 명이 가게에 딸린 방에서 먹고 잤다. 돈 없어도, 고모는 자식들을 푸짐하게 먹였다. 하루도 가게 문을 닫지 않고 일했다.
"고모랑 살면서 마음이 넉넉해지니까 뒤늦게 사춘기가 왔어요. 옛날에는 항상 주눅 들어서 살았는데 제 목소리를 내게 된 거예요. 고모한테 반항했어요. 괜한 일로 한 달 동안 말도 안 하고, 같이 밥도 안 먹었어요. 고모가 '내가 졌다, 졌어! 영미야, 그러니까 밥 먹어' 하면서 품어주셨어요."고모는 한없이 너그럽지 않았다. 영미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각종 증명서를 내야 했다. 고모는 조카를 동사무소 앞까지만 데려다줬다. 서류 떼는 일은 영미 스스로 하게 했다. 사춘기 여자 아이는 그런 일이 부끄러웠다. 어물어물 말하면 시간만 더 걸리니까 "기초생활수급자 증명서!"를 입에 붙게 연습했다. 신속하게 서류 발급을 했다.
"교통사고라도 났으면"... 지긋지긋하게 대학신문을 만들다고1 때 담임 박미정 선생님은, 그녀가 돈 안 내고 급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학비도 안 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른 학교로 전근 가서도 책을 보내주었다. 영미는 그 선생님 덕분에 국어 공부에 눈을 떴다. 다른 과목도 조금씩 잘하게 됐다. 국립이라 학비가 싼, 군산대학교 국문학과에 합격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 대학에 다닌 적 없는 고모가 영미의 대학 입학금을 대주었다. 매달 5만 원씩 용돈까지 챙겨줬다. 학교 다니면서 틈틈이 고모 가게 일을 돕던 영미는 방학 때는 알바를 두 탕씩 뛰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밤새 라면을 끓이고, 오전에는 관공서에서 일했다. 낮에 집에 들어가서 4시간만 자고는 다시 고속도로 휴게소로 출근했다.
새내기 대학생, 영미는 대학신문사 포스터를 보고 설렜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선배들에게 글쓰기부터 배웠다. 원고지 1매당 2500원, 한 달에 받는 원고료가 30만 원일 때도 있었다. 알바 안 해도 될 만큼 큰돈이었다. 많은 시간을 신문사 일에 쏟아 부었다. 학교에서는 2학년 이상의 학생기자들에게 전액장학금을 주었다.
"진짜 열심히 했어요. 3학년 때, 제가 편집장이 될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근데 제 동기가 됐어요. 제 안에 욕심이 있었나 봐요.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다'는 말이 있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이유 없이 배가 아팠어요. 너무 아파서 사흘 동안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고 웃기죠." 영미는 4학년 때 편집장을 했다. 신문은 1년에 15회, 한 달에 2회 발행할 때도 있었다. 일이 고되니까 학생기자들은 쉽게 그만뒀다. 그녀는 신문사에서 살았다. 8쪽짜리 신문을 세 명이 만든 적도 있었다. 날짜 잡고, 인터뷰 하고, 글 쓰는 게 힘들었다. 책임감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다. "교통사고 나서 입원했으면 좋겠다"면서도 끝까지 신문을 만들었다.
졸업을 앞둔 가을, 군산 <서해교차로>에서 일하는 선배가 찾아왔다. "생활 정보신문이지만 네가 쓰고 싶은 기사는 계속 쓸 수 있어"라면서 근무 조건과 급여를 얘기했다. 지방의 다른 신문사보다는 대우가 좋았다. 회사의 수익 구조도 안정적이어서 기자가 영업 안 해도 되는 점에 끌렸다. 영미는 대학 졸업하자마자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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