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팽>의 저자 백시종
이희훈
한 사람이 있다. 소설가로 명성을 얻어 현대그룹 홍보실에 채용돼 사보 제작을 맡았다. 1980년대 내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 등을 보필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0년 만에 홍보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승진 다음 날, 갑자기 파면 통보를 받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고, 잡지에 연재했다. 이명박 회장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MB가 저를 불렀습니다. 건설사 하청 업체를 하나 줄 테니 운영하라고 했습니다. 대신 현대그룹에 대한 나쁜 감정은 버리라고 회유하더군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하청 업체 사장들이 좋은 차를 몰고 잘 살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제안을 받는다면, 소설을 팔아 한몫 잡은 사람이 되는 불명예가 남습니다. 작가의 양심을 팔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절했지요."
그는 최근 자전적 소설 <팽>(새움출판사)을 낸 백시종(72)씨다. 출간일인 지난 2일 오후, 경기도 양평의 자택에서 백씨를 만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대한 평가도 들을 수 있었다.
경남 남해 출신인 백씨는 1966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한국소설문학상, 한국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채만식문학상, 류주현문학상, 한국문학백년상 등을 수상했으며 지난 2012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필화 사건 26년 만에 다시 꺼낸 자전 소설 소설 제목으로 삼은 '팽'은 고대 형벌 중 하나로, 삶아 죽이는 사형인 팽형(烹刑)에서 나온 말이다. 소설 부제는 '필요할 땐 다급하게,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다. 승진한 다음 날 아침에 '팽'당한 명광그룹 홍보부장 박종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팽>은 실제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 소설 속에서 현대그룹은 명광그룹으로, 정주영 그룹 회장은 왕득구로,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은 유문봉 회장, '엠비유'로 그려져 있다. 왕 회장은 복잡한 여자 관계에 얽혀 있고, 비이성적인 언행 탓에 직원들의 불만이 높다.
엠비유는 왕 회장에 버금가는 실세로 나온다. 주인공 박종산이 홍보부장에 내정된 뒤 석연치 않은 이유로 파면 당하는데, 그 후임으로 K라인이 들어온다. 박종산은 엠비유가 파면에 개입했음을 확인한다. 이후 명광그룹의 부조리와 횡포를 고발한 소설 <돈황제>를 펴내지만, 명광그룹의 돈과 권력으로 서점에서 책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실제로 백시종씨는 1989년 현대에서 파면 당한 뒤 <돈황제>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했다. 하지만 책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서점에서 자취를 감췄다. 당시 <한겨레>의 기사
"소설 <돈황제> 대형서점서 '증발'"을 보면 이 같은 정황이 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사에서 서점 관계자는 "책이 안 들어오고 있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라며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책이 사라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후 이 소설은
필화 사건으로 번지면서 화제가 됐다. 1993년에는 같은 이름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매일 여론 조사 결과만... 정주영 3위로 밀리니 배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