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스탄 아이들선생님들이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현장체험학습을 왔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모두 주인공이 되어 일어났다.
윤인철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인도 아이들의 미소가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인도 아이들의 모습과 함께 요즘 한국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청소년들의 얼굴에서 생기 있는 미소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급식을 기다리면서도, 소풍을 가서도 스마트폰 화면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스마트폰 속에서 홍수와 같은 정보를 만나고, 가상의 세계에서 노닐고,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한판 신나게 논다. 스마트폰 속에서 그는 항상 주연이 된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덮었을 때, 그는 다시 현실 속의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주연에서 카메오로 배역이 전환된다. 그리고 생동감 있는 미소는 냉소와 무기력으로 바뀐다.
가상 세계의 주연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주연이 될 아이들이 아니던가? 잘못된 시나리오에 따라 그의 무대는 전이(轉移)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문제인가? 스마트폰이 문제인가? 그럼 아이들을 데려다 교육만 잘 시키면 되는가? '이것은 옳은 것이고 이것은 그른 것이다. 알겠지?' 아니면 학생들의 스마트폰 사용만 규제하면 될까? 우리 아이들에게서 인도 아이들의 미소를 보고 싶다. 그런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서 우리는 또 이렇게 얘기할까?
스마트폰 덮고 공부나 해! 열심히 공부하면 행복해질까? 혹여나 처음부터 시나리오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교탁 위에 서서 아이들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프다. 교사가 아닌 아이들보다 먼저 살아 온, 지금과 같은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한 선배로서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나 또한 단호하게 말한다.
"조용히 해! 수업 방해하는 놈은 알아서 해. 다른 아이들 공부하는 데 방해만 되는 나쁜 놈들."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벌써부터 뭘 안다고. 지가 공부하기 싫으니까 운동하겠다, 연기하겠다 그러는 거지!""그런 놈은 뭘 해도 똑같아. 이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놈이 사회에 나가서 뭘 잘 하겠어? 직장 생활하다 쫓겨나겠지.""그래도 어쩔 수 없잖니? 여긴 학교잖아. 공부해야지! 생각해 봐. 대학교 가서 너의 꿈을 펼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 아니겠어? 보충 수업 빠지는 놈 치고 좋은 대학 가는 놈 못 보았어!"그래 이것이 나다. 교사 윤인철이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이 사회의 요구에 따라 길들여진 교사이고, 이 사회 체제에 적응하는 인재를 키워내는 것이 임무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당연히 내가 해야 할 본분이다.
하지만 윤인철은 꿈꾼다. 지금 사회 체제와 교육 시스템을 전복하고 부정하는 꿈이 아니라, 그냥 아이들에게 편하게 '삶'을 물어보는 꿈!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꿈 말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작은 변혁의 씨앗을 뿌리고 행복한 아이들이 주체가 되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꿈!
"넌 뭐가 좋으니? 뭘 하고 싶니? 뭘 할 때 제일 행복해? 넌 잘 하는 게 뭐야? 어떻게 살고 싶은데?"그럼 아이들도 온몸으로 웃지 않을까? 교사는 처절하게 현실적이어야 하지만, 그 가슴은 몽상가이어야 한다.
"지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I am a pessimist, because of intellgence. But I am a optimist, because of will)." - 안토니오 그람시시티 팰리스를 보고 외국인에게 개방되는 소수의 힌두 사원 중 하나인 '작쉬 만디르'에 갔다. 무희, 코끼리 등 건물 외벽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상, 예배당 안에서 울려 퍼지는 힌두교도들의 노래와 박수 소리에 속과 성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특히 여성들이 삼삼오오 들어와 예배당에 앉아 부르는 단조로운 가락의 노래는 나의 종교적 기질과 궁합이 딱 맞는 듯 순식간에 무아지경에 취해버리고 말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힌두 종교 의식인 푸자가 열린다고 했다.
'게으름만 피지 않으면 다시 와야지.' 콜라는 달라던 아이한테 빵을 주니... 잊을 수 없던 표정카페에 들러 점심 식사로 빵과 음료수, 과자를 먹고 피촐라 호수가로 갔다. 어여쁘게 생긴 한 여자 아이가 다가오더니, 손을 벌렸다. 돈을 달란다. 돈이 없다면 먹을 것이라도 달란다. 우리는 애써 외면했다. 우리의 도움이 그 아이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며, 역설적으로 그 아이의 삶을 망칠 수 있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안할 정도로 거절을 반복했지만, 아이는 상관없다는 듯 계속 우리를 쫓아왔다. 그 곁에는 그녀의 엄마와 품에 안긴 동생이 있었다. 어머니도 이 구걸에 동참하여 조연으로 출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