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H 농촌총각들과 함께4H 농촌총각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이재형씨 동료들 중에는 소농장, 특수작물 농장 등을 하는 총각들이 대부분이다.
송상호
이런 재형씨에게 '어머니의 쓰러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세상의 어떤 아들도 그랬겠지만, 특히 재형씨에게 더 충격이었던 건 그가 앞으로 살아갈 이유가 사라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재형씨는 대학을 당장 그만두고 어머니의 병수발을 들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점차 회복이 되어 요즘은 고된 일은 하지 못해도 자신 스스로 기동은 하신다고 했다.
"군대를 '집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복무했어요" 어머니가 회복되자 재형씨는 마음을 더 다 잡았다.
'이제부터 농원을 내 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한참 친구들 만나고, 자신의 관심사에 푹 빠져 있을 수 있는 20대 총각은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때, 군대에 갈 나이가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재형씨는 길을 알아봤다. 산업기능요원의 길이 있었다. 산업기능요원? 그건 한마디로 '군대가 곧 집'이 되는 경우다. 군대에 가는 대신 부모님의 농사를 도와 자신이 농사를 경영하면 군대복무와 똑같이 인정받는 제도다. 이때 재형씨는 안성 4H(지(智), 덕(德), 노(勞), 체(體)를 추구하는 한국청년운동단체)에도 가입하게 되었다.
재형씨는 아버지와 함께 농원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천 평 정도의 밭에 작물을 심었다. 그 작물은 고스란히 농원 손님들의 밥상에 올랐다. 표고버섯도 재배하고 논농사도 했다. 농원의 필요에 따라 각종 건물도 지었다.
그가 이렇게 열심히 일한 이유를 "내가 게을리하면 그 전의 상태로 돌아갈까 봐 잠시라도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는 그의 말에서 읽을 수 있었다. 바쁘게 살아온 결과, 지금은 농원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많이 회복이 되었다.
이젠 장가가겠다는 목표도 알고 보니...재형씨는 올해부터 안성 4H 회장을 맡았다. 이런 데는 그만의 이유가 있다. 자신이 힘들 때, 함께 해준 4H 동료들이 고마워서이다. 자신도 어머니도 이제 홀로서기를 해야할 때가 되었다는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