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한 시민에 의해 훼손된 삼전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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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의 역사가 담겨 있다 보니 욕비(辱碑), 석괴(石怪) 소리를 들었던 삼전도비는 또한 많은 수난을 겪으면서 이 자리에 서게 됐다. 삼전도비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조공 관계가 단절되자 고종의 명으로 강물에 수장시켰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다시 그 자리에 세워졌고 조선의 보물로 지정됐다. 일제는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이민족에게 지배받은 사실을 강조하여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1945년 광복 후 삼전도비는 분노에 찬 지역민들에 의해 다시금 땅 속에 매몰되었다.
하늘도 역사의 교훈으로 삼으라고 인멸을 허용치 않아서였을까? 1963년 발생한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나자, 정부에서는 역사의 반성으로 삼자는 의미에서 사적 제 101호로 지정하면서 송파구에 다시 세웠다. 이후 잠실과 송파가 개발되면서 1980년대 초에 국치의 상징물이라 하여 땅에 묻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중국에서 외교적 항의가 들어와 500여 평의 공원에 인조 임금이 항복하는 장면을 동판으로 새겨 비석 옆에 설치해 줄 것을 요청,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그 후 공원과 동판은 치워졌으나 2007년엔 당시 30대의 어느 시민이 붉은 페인트로 비석을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다.
수난의 역사를 상징하듯 비(碑) 자체도 이처럼 수난의 세월을 보냈다. 지금 비석의 글자는 대부분 훼손돼 있다. 그러나 비석이 가르쳐주는 교훈은 선명하다. 치욕과 더불어 치욕의 역사도 간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치욕의 역사를 잊으면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된다. 삼전도비는 그러한 치욕을 불러온 원인과 잘못을 기억하라며 후손에게 역사의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전인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을 겪었음에도 아무 대비도 없이 청나라를 도발한 인조 임금의 무모함, 전쟁으로 말미암아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사람들을 손가락질하고 천대한 사대부와 백성들... 삼전도비 앞에 서있다 보면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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