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행지를 거실 베란다 유리창에.일정에 따른 동선을 거실 베란다 유리창에다 글라스데코 물감으로 그려 붙여놓았다.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라는데, 검은 선으로 베트남 지도를 그려놓고 유적지의 위치를 표시한 것 같다.
서부원
책상 위에는 베트남에 관한 정보를 모아놓은 공책도 있었다. 어디서 찾았는지 현지에서 가고자 하는 곳의 교통편의 요금과 시간을 조사했고, 유적지의 입장료는 얼마인지까지도 일일이 적어놓았다. 심지어 지역별 평균 기온과 먹어봐야 할 현지 음식, 문화적으로 조심해야 할 행동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등도 짜깁기하듯 메모해뒀다. 글자는 비록 삐뚤빼뚤하지만, 웬만한 여행가이드 책자 뺨치는 수준이다.
그런가 하면, 며칠 전에는 가려는 곳의 '랜드 마크'를 글라스데코 물감으로 그려 거실 베란다 유리창에 줄 세워 붙여놓았다. 말하자면, 여행의 동선을 표시해놓은 것이다. 공책에 적고, 스케치북에 그리고, 거실 베란다 유리창에 붙이며 나름대로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거지만, 실은 그에게 있어 그건 그저 신나는 '놀이'일 뿐이다. 하마터면, 어지럽힌다며 혼낼 뻔했다.
몇 해 전부터 우리 가족의 해외여행 준비는 온전히 초등학교 6학년인 그의 몫이 됐다. 다음 여행할 나라도 기실 그가 결정할 때가 많다. 이번에도 처음엔 말레이시아로 정했다가, 댕기열로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에 두어 달을 남겨놓고 급작스럽게 베트남으로 변경한 것이다. 말레이시아로 정했던 건, 이슬람 문화를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이젠 철이 들어선지 요즘엔 여행 통장의 잔고도 살필 줄 안다. '터키로 정하려다가 경제적 여건을 고려해 말레이시아로 낮췄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터키와 말레이시아까지 가는 항공료가 대충 얼마인지는 기본이고, 어느 항공사가 몇 번 경유하고 더 싼지, 심지어 항공사마다 기내식으로 주는 음식이 무엇인지조차 그는 훤히 꿰고 있다. 하긴 요즘 그의 스케치북에는 공항과 비행기에 대한 그림이 부쩍 늘었다.
어차피 그에게 들어갈 사교육비로 여행하는 셈이니, 그가 원하는 대로 계획을 짠다. 세부 여행지를 정하는 것도, 현지 교통편을 감안해 일정을 짜는 것도 다 아이가 한다. 부모가 해주는 일이라곤 정한 대로 결제하고, 두툼한 여행 관련 책자 한 권 사서 그에게 장난감 삼아 던져주는 것뿐이다. 서너 번 그가 계획한 대로 여행을 다녀왔지만, 일정이 크게 어그러지거나 불만스러웠던 기억은 별로 없다.
이슬람 문화를 체험하겠다는 계획은 미뤄졌지만, 베트남에서도 보고 싶은 게 있다며 그는 분주하게 책을 읽었고 인터넷을 뒤졌다. 어디를 여행하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미리 봐둬야 할 게 많다고 했다. 그는 일본을 세 번이나 다녀왔는데도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며,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가서 그렇다며 지금도 후회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