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라 피나타란 아궁 메루탑세계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 메루가 높게 솟아있다.
노시경
브사키 사원군의 여러 힌두교 사원에서는 일 년 내내 제례가 끊이지 않는다. 브사키 사원에서는 발리의 발리 달력이 정해놓은 1년(210일) 중 총 55회의 제례가 열린다. 오늘도 푸라 피나타란 아궁의 곳곳에서는 힌두교 신자들이 정성스럽게 제물을 올리고 있다.
주제단 깃대 위에 걸린 작은 파라솔 모양의 노란색, 흰색, 빨간색의 장식물들은 각 신들을 나타낸다. 왼쪽 방향부터 노란색이 비슈누, 흰색이 시바, 빨간색이 브라흐마를 상징한다. 그렇게 활달하던 발리인들도 주제단 앞의 자기가 모시는 신 앞에서 모두 경건하게 앉아 있다. 제단 주변에서는 말 소리도 크게 들리지 않는다. 발리 섬의 최고 중심 사원 안에서 발리인들 모두가 성심을 다해서 기도를 올리고 있다.
이곳에 몰려든 힌두교도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듯 사원 뒤쪽에 걸터앉아 제례가 진행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이들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힌두교의 신들을 모시고 힌두교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주를 관장하는 신, 시바이 사원 바로 뒤편에 자리 잡은 아궁산은 발리에 힌두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성스러운 곳이었고, 이곳에서 발리 현지들은 고대로부터 신에게 제사를 지내왔었다. 그리고 자바 섬에서 넘어온 힌두교도 왕족도 이 사원의 영험한 힘을 믿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현재 이 푸라 피나타란 아궁에서는 힌두교의 주신, 시바 신을 모시고 있다.
발리의 힌두교도들은 우주의 원리를 관장하는 시바 신이 최고의 신이라고 믿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시바 신이 땅 위에 나타난 것이 왕이라고 믿었기에 발리의 왕들은 이 사원의 시바 신을 극진히 모셨다. 지금도 발리 왕가의 자손들은 이 사원에서의 제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으며, 각자 사원 내의 여러 건물을 관리해야 하는 의무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왕의 후손들이 관리하는 이 사원은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듯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나는 아궁산 아래, 단구(段丘)의 제일 높은 성소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 사원 주변의 발리 현지인들은 외국 관광객에게 돈을 내면 향도 피우고 절을 할 수 있다고 권하기도 한다. 이들이 나에게 접근을 하지 않는 이유는 내 옆에 오늘 가이드를 해주고 있는 발리 현지인, 아롬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시바 신 앞에서 굳이 향을 피우거나 절을 하지는 않았다. 왠지 낯선 신 앞에서 소원을 말하는 게 선뜻 내키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앉아 소원을 빌기보다는 아궁산 아래를 바라보며 명상을 하면 마음이 저절로 정화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원을 내려가면서 보니 한 사당 건물의 벽면 전체가 푸라 피나타란 아궁의 제례 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 아롬이 이 사진들과 발리인들의 마을을 함께 내려다보며 푸라 피나타란 아궁의 시바 신과 제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푸라 피나타란 아궁에서는 자체적으로 큰 제례 행사를 여는데, 1년에 한 번, 10년에 한 번, 그리고 100년마다 한 번씩 연다고 한다. 100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행사는 말 그대로 세기적인 행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