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업도 핵폐기장 문제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인천시장 후보자 초청 대담·토론회’가 ‘인천 앞바다 핵폐기장 대책 범시민협의회’ 주최로 1995년 6월 19일 만수1동 성당에서 열렸다.<출처·백서 ’굴어도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인천시민운동’>
한만송
1995년 5월 20일 동인천역 광장에서 열린 '인천 앞바다 핵 폐기장 철회를 위한 3차 궐기대회'는 격렬한 시민 저항을 표출했고, 이로 인한 피해도 발생했다. 학생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경찰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이 다치고, 일부 학생은 구속됐다.
여름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속에서 대회를 마친 집회 대열은 답동 성당까지 평화 행진을 했고, 흥분한 일부 대학생이 차량 통행을 차단하고 연좌농성 등을 했다.
대회에 참가한 인천부천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소속 학생들은 덕적도 주민만큼이나 굴업도 핵 폐기장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서울과 경기지역 대학생들도 가세했다. 학생들은 경동파출소와 대한서림 등을 오가며 가두시위를 전개했고 시민들에게 핵 폐기장의 부당성을 알렸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페퍼포그를 동원해 최루탄을 발사했고, 시위대열 앞뒤 다수의 사람이 심한 구타 등으로 부상당하고 연행됐다. 경찰은 학생뿐 아니라 일반시민도 연행하려 해, 마찰을 빚었다. 장 파열로 위중한 상태에 빠진 참가자도 있었다.
전투경찰과 백골단으로 불리는 특수경찰은 답동성당 안까지 들어와 사과탄과 돌을 던지기도 했다. 경찰의 무리한 진압에 항의해 오후 10시 30분께 중부경찰서를 방문한 학생 200여명은 군사정권 때나 행했던 폭력 진압으로 구타를 당했다. 구타를 당한 학생들은 경찰 버스 안에서도 구타를 당했다.
심지어 경찰이 버스 안에서 최루탄을 터트리는 바람에 공포심에 질려 실신하는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다. 문민정부를 표방했지만,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자, 군사정권 때 즐겨 이용한 폭력이 습관처럼 나온 것이다.
이날 3차 궐기대회에서 덕적도 주민과 학생 50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134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또한 9명이 즉결심판에 넘어갔고, 4명이 구속됐다. 이날 시위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인천 5·3항쟁 후 인천에서 벌어진 가장 격렬한 시위였다.